모래, 순간에서 불멸을 꿈꾼다

구성연 사진전 <모래> 6월 1일까지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

등록 2004.05.23 17:43수정 2004.05.2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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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장미, 120x150, 컬러프린트 ⓒ 구성연

복잡해지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를 설명하기에 사건과 시각 중심적인 전통적 사진 표현 방식은 너무나 제약이 많았다. 자연히 조작되고, 연출되고, 만들면서 표현의 한계를 넓혀 왔는데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라면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과 함께 꽃피운 구성사진이다.

만들어진 형상을 사진으로 찍어내는 구성사진을 두고 철지난 표현 방식으로 치부하는 것은 양식을 주제로 읽어 버리는 경솔한 행위이다. 한때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이 양식이 가지는 설득력이 너무나 단단하고, 아직도 다양한 주장과 새로운 개성을 담아낸 작품들이 끝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구성연의 사진은 모래 조각 작업이다. 전국을 돌며 채취해 온 모래에 물을 먹이고, 몇시간 공을 들여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낸 후 한 컷 찍는 식이다. 조각미술과 사진매체의 경계 언저리에 애매하게 위치하고 있음은, 현대미술 및 순수사진예술의 자연스런 귀결점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래라고 하는 한순간 사라져 버리는 재료를 선택함으로써 그 만큼 더 이 작업의 독특한 가치를 찾아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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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120x150, 컬러프린트 ⓒ 구성연

소재의 선택은 구상연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영원한 진리을 담고 있는 책,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 한순간 불꽃 처럼 피었다 지고 마는 장미. 모두가 순간과 영원의 텍스트를 반어적으로 때론 직접적으로 찾아보게 하는 재료들이다.

사진 감상이란 것이 다분히 주관적이고, 또 관객들에게 자유로운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 또한 노련한 작가의 역할임을 감안할 때 슬쩍슬쩍 끼워져 있는 유머를 찾아 보는 것도 재밌다. 거북이, 문어, 잉어, 그리고 뱀. 장수를 상징하는 생물들이기도 하지만, 소위 먹으면 힘 좋아진다는 그 자양강장제들 아닌가. 눈치챈 사람들은 "풋"하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궁금증을 유발하는 소재도 있다. 가방과 돼지저금통? 이궁리 저궁리 해 보아도 별 상상이 안돼 슬쩍 물어보았더니, "궁금하시죠? 한번 열어 보세요"라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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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저금통, 60x50, 컬러프린트 ⓒ 구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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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 120x150, 컬러프린트 ⓒ 구성연

사진을 전공하기 전에 철학을 배웠던 탓일까? 군데 군데 숨어 있는 암시들이 너무나도 무궁무진해 그 재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찾는 사람들이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봐요. 재밌는 건 어떤 일관된 특징이 있다는 거죠. 파란 바탕의 바닷동물 세점에서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는 분들은 열에 아홉 고향이 바닷가더군요." 이 대목에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왜? 내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사진은 "책"이었으니.

구성연

구성연koo seong youn
cookoo999@hanmail.net / 017-749-6270

1997 서울예대 사진과
1994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개인전
2004 모래, 덕원갤러리
2002 구성연전, 스타타워갤러리
2001 유리-두번째개인전, 한전프라자 갤러히
2000 나비, 서남포토스페이스

그룹전
2004 RED ROSE & POSCO, 포스코미술관
2003 미술과 놀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003 일상의 낙원, 갤러리 프리즘 대전
2003 맛있는 미술관, 인사아트센터
2002 진실의 시뮬라크르, 갤러리 룩스
2002 New Face, 토탈미술관 장흥
2000 하우아트 사진콜렉션전, 하우아트갤러리
1999 99-아를 한국의 젊은 사진가들, 한림미술관 대전
1999 아를 사진영상축제, 아를
1998 A4-얼과 골, 경인미술관
1998 보고서/보고서 0.1세기 선언전, 갤러리 사이
물론, 단순히 재미로 대하기에 작품들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은 그리 녹록친 않다. 일감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는 찰나적 아름다움에 대한 부질없음이다. 4x5인치 대형 필름으로 만들어낸 120x150 cm 프린트에는 모래의 섬세한 질감이 만져질 듯 선명하게 드러난다. 붉은 빛이 진하게 드리워진 천 위에서 잘 조절된 빛에 의해 하얗케 노출된 모래 장미는 그 선명한 질감으로 인해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난다.

하지만 모래로 만든 아슬한 조각은 한두시간안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시 한줌 재로 돌아가고 만다. 그 절정의 짧은 시간을 순간의 미학으로 불리우는 사진 매체에 담아두려는 시도는 너무나 또렷한 메시지를 내보여 준다.

며칠 전 호텔 도어맨들의 경차 차별 행위를 꼬집은 기사 생각이 났다. 껍데기 이미지가 강조되는 불안정한 세태. 인간 내면의 숭고한 아름다움은 묻혀지고,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나 소비되는 라떼르로 온 몸을 치장하고서야 그 이너 서클 주변에서의 동질성과 일말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우리들의 서글픈 초상. 끊없이 소비되어야 하는 물질에 매달리고, 현실 대응은 즉흥적이며, 그럼으로써 더더욱 서로에게 소외되어가는 암울한 현실의 단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작가의 성숙한 내면은 그런 대안 없는 직설 화법에서 그치지 않고 딱 한발자욱 더 나아간다. "사라진다구요? 에이, 아니에요. 그 모래로 다시 작업하면 되지요. 돌고 도는 거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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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120x150, 컬러프린트 ⓒ 구성연

복고풍이라고 한다. 낡은 비닐 LP판의 풍성한 울림. 슬라이드 필름에 농축된 깊은 컬러가 다시금 애용되는 시대. 거칠고 기괴한 직설화법이라야 작가 정신이 투철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한 영상만이 심오한 예술이라고 여겨지는 화랑가. 새삼스럽게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또렷한 영상과 은근한 간접화법으로 담아낸 구성연의 사진은 아날로그적 감성에 실려 더욱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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