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시인학교>의 정동용 사장안병기
손님 옆 자리를 결사적으로 사수하려는 이 억척스런 주모가 차츰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증오를 좀 더 확실히 부풀리기 위하여 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그가 힐끗 웃는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선량하기까지 했다. 그를 미워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제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리에 합석했다. 주인의 친구인 그 사내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심종록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현대시학>에서 자신의 시를 찾아내어 보여 주었다. 몇 줄 읽지 않았지만 제법 언어를 부릴 줄 아는 솜씨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사동에 가면 <꽃을 던지고 싶다>라는 상당히 오래된 카페가 있다. 심종록의 詩에도 <나는 꽃을 던지고 싶다>라는 詩가 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꽃을 던지고 싶다
붉은 꽃을 던지고 싶다
그러니까 그대가
내 가슴에 한아름 안긴
한아름 피워 올린
뿌리 잘린 엉겅퀴 꽃을 던지고 싶다
내 사랑은 뿌리 잘린 붉은 가싯잎
내 욕망은 뿌리 잘린 붉은 줄기
내 절망은 뿌리 잘린 붉은 꽃
내 권태는 뿌리
그러니까 안개꽃 더미 속에 어울리지 않게
생생한 내 주검도 붉은 꽃
나는 꽃을 던지고 싶다
그러니까 욕을 던지고 싶다
욕도 붉은 꽃
줄기가 시퍼렇게 억세다
심종록 詩 <나는 꽃을 던지고 싶다> 全文
욕은 삶의 강자(强者)들이 즐겨쓰는 수단이 아니다. 그들에겐 그것말고도 대체 수단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위선으로 가득찬 사람들도 욕을 뱉지 않는다. 욕이란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분노를 드러낼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동시에 가장 유효적절한 수단이다.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은 누군가가 안겨주는 꽃다발마저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때로 그것마저도 세상이 던지는 비웃음으로 받아 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종록 시인. 그는 겉으로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속으로는 세상을 향해서 욕이라는 "줄기가 시퍼렇게 억센" 꽃을 키우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재작년 8월 국악인의 첫 모임인 <신명나는 세상>을 나의 제안으로 <시인학교>에서 갖게 됐다. <시인학교> 주인인 정동용 사장이 "형, 8년만에 왔네"라며 반겼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온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생의 곡절이 만만한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스쳤다.
제 멋대로 흘러가는 세월은 엉뚱하게도 내게 흰 머리만 남긴 채 흘러갔지만 이 집 주인의 손님 술자리 절대 사수라는 불굴의 의지만은 그대로였다. 연신 "형, 나 가봐야돼, 장모님이 위독하시다니까"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자리를 털고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심종록의 안부를 물었다.
"응, 종록이 자가용 운전해."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가 남의 자가용 운전으로 먹고 살다니…. 삶이란 어쩌면 자기에게 안겨진 '욕'이라는 붉은 꽃을 차마 던지지 못하고 사는 것인가? 던져버리고 싶은, 차마 던져 버리지 못하는….
모임 이후 <시인학교>에 발걸음을 할 적마다 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허름한 점퍼를 걸쳐입고 홀로 하릴없이 앉아있는 사내. 정 사장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가 바로 함민복이라는 것이었다.
"불러 올까"
나는 손사래를 저었다. <눈물은 왜 짠가>라는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소박한 탐구심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데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詩 <눈물은 왜 짠가> 全文
그는 이 <시인학교>라는 생의 대안학교에서 "눈물은 왜 짠가?"라는 숙제를 완결치 못해 아직도 유급중인 상태인 모양이다. 나한테 물어보면 금방 가르쳐 줄텐데 말이다. KBS의 <개그 콘서트>라는 프로그램 식 버전으로….
"눈물은 왜 짠가?"
"안 짜면 이상하니까."
내가 보기에 함민복은 숨바꼭질 선수다. 세상의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는 온갖 눈물의 소스를 찾아낸다. 그리고 맛 볼수록 싱거운 세상의 간을 맞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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