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의 한, 춤으로 풀어냈지요"

임응희의 창작춤판 <꽃은 피어 웃고 있고>를 보고

등록 2004.05.24 00:08수정 2004.05.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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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 '회상'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 '회상' ⓒ 김현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접했을 때 가슴이 먹먹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은, 이 땅의 여성으로서의 아픔, 혹은 우리 어머니들 삶의 총체적인 아픔이지요."

a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아픈 역사로의 춤 기행 '자장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아픈 역사로의 춤 기행 '자장가' ⓒ 김현숙

'일본군 위안부'라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춤으로 아우른 무대가 있었다. 지난 22일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서울대회의 공식 초청으로 올려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진혼의 춤, <꽃은 피어 웃고 있고>의 춤꾼 임응희씨(안무·대본)의 창작 춤판은 그간 봐 왔던 여느 춤 공연과는 사뭇 달랐다.


그곳에는 화려한 의상, 무대장치, 저명 인사의 음악도 없었다. 춤꾼들은 흰 저고리에 발목이 보이는 짙은 회색 치마를 입고 맨발에 댕기 머리를 질끈 묶었을 뿐이다. 우리 귀에 친숙한 민요, 전래동요, 상여소리 등을 국악인이 아닌, 현장의 투박한 소리를 그대로 담아 춤으로 풀어냈다.

"할머니들의 아픈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대신해 주고픈 마음, 아직도 진행 중인 일본군 피해자들의 문제를 함께 하고 싶었다"며 이 같은 춤의 주제를 설정했다는 임씨는 춤으로 그것을 형상화하는데 할머니들이 겪었을 아픔의 깊이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공연을 보는 관객들 또한 같이 아파하며, 서러운 역사에 대한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 속울음을 참아냈다. 이근배씨(학생, 26세)는 “고향에 계신 할머니 생각이 나서 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느낌을 느꼈다”며 "전통 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였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a 삶의 질곡을 나타낸 막춤 '진도아리랑'(좌) 맺힌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는 '살풀이' (우)

삶의 질곡을 나타낸 막춤 '진도아리랑'(좌) 맺힌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는 '살풀이' (우) ⓒ 김현숙

관객의 대부분은 춤의 주제를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었지 춤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부모 손에 이끌려 온 초등학생부터 노인층까지 다양했다.

그녀의 춤에는 툭툭 터뜨리는 봄날의 화사한 꽃망울처럼 경쾌하고 활기가 넘친 춤사위가 있는가 하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섬세한 부드러움이 있었다.


‘회상’(2장) 장면에서 열댓 살 처녀들의 발랄한 춤사위, 원한 맺힌 망자의 넋을 달래는 ‘상여소리’(5장) 사이로, 연지곤지 찍고, 화려한 혼례복을 입은 새색시가 걸어 나왔을 때, 관객은 끝내 울음을 찍어냈다.

새색시가 되지 못하고 망자가 되어 버린 그 한을 하늘로 인도하는 ‘살풀이’(5장)에서의 서른 세 번의 종소리는 가신님들의 길에 평안함을 기원하는 듯, 끝없이 하늘을 향해 뻗어내고 다시 거둬들이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꽃은 피어 웃고 있고> 관객 표정

"위안부 문제, 이분들의 삶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회사원 송선영씨(28세)

" 전통적인 것을 벗어나는 듯 하면서도, 전통을 고수하며 깔끔하면서도 가슴 찡한 감동에 눈물이 났다."
- 한국외국외대영문과 오영숙교수

"식민지 시대 한국 여성의 희생을 소재로 삼아 이미지를 창출해 내는데 있어 포커스를 참 잘 맞췄다."
- 서울예술단 채상묵 무용감독

"공연을 보고 좀 더 역사에 대해, 피해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원 김상준씨(32세)

"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좀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우리 춤이 이렇게 멋진 줄 몰랐다."
-대영고등학교 1학년 김정은씨 / 정희경
임응희의 춤은 그래서 역동적이고 부드러웠다. 그곳에 슬프고 애절함만 배어있다면, 관객은 답답했을 것이다. 공연의 총 연출을 맡은 김진환씨(김진환 무용예술원 '용오름' 대표)는 "문화예술은 그 시대와 역사를 대표하는 것이여야 하며, 정치ㆍ종교ㆍ현실을 배재하고 문화예술을 말할 수는 없다"라고 문화예술 또한 현실의 대중적 바탕 위에 정교한 예술성이 올곧게 자리 매김 되어 나타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그러기에 춤판 하나하나에는 전통춤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모양만 다를 뿐, 살풀이, 양산사찰학춤, 정재학춤, 처용춤사위, 봉산탈춤, 풍물사위, 춘앵전, 승무 등 다양한 우리의 전래춤을 기술적 기본 토대로 새로운 창작춤으로 녹여 냈다.

이러한 과정은 춤에 문외한 관객들이 좀 더 우리 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친근함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춤꾼과 관객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이 자주 올려지길 기대해 본다.

a 평생을 안고 살았던 아픔의 한 '시집살이'

평생을 안고 살았던 아픔의 한 '시집살이' ⓒ 김현숙


a 우리곁을 떠난 할머님들의 무덤을 다지는 '상여소리'

우리곁을 떠난 할머님들의 무덤을 다지는 '상여소리' ⓒ 김현숙


a 지전춤 속의 '살풀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세요"

지전춤 속의 '살풀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세요" ⓒ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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