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71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5.31 09:30수정 2004.05.3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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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숲가에 도착했다. 그 나무들이 왜 길게 뻗어있나 했더니 그 가운데에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무들은 시내 양 옆으로 빼곡히 줄을 섰는데, 에인이 한번도 보지 못한 키큰 타마린드와 버드나무가 주종이었다. 두두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세수나 하고 가지요."

에인이도 말에서 내렸다. 천둥이는 두두의 천리마 옆으로 가서 사이좋게 물을 먹었고 두두는 두 손으로 냇물을 찍어 흐트러진 머리를 바로잡고 있었다. 여행 전에 머리를 잘라서 단정해보임에도 그는 늘 그렇게 머리에 태를 부렸다. 언젠가 녀석은 꽃을 따서 자기 천라마 귀에 칭칭동여 주면서 '여자는 꽃 치장을 좋아하고 남자는 머리치장을 좋아한 대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흠, 너도 벌써 남자가 되어 간다는 말이지….'
에인이 그런 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고 있는데 두두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장군님도 머리를 좀 다듬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왜?"
"왜냐하면… 마을엔 처녀들도 있거든요."
"처녀? 처녀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
"혹시 알아요? 우리 외할머니처럼 장군님 좋다는 처녀가 있을지도."
"처녀가 있으면 뭘 하냐? 난 여기에 주저앉을 사람도 아닌데…."

그리고 에인은 손의 물기를 털고 일어나며 시내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내의 끝은 유프라테스 강과 닿아 있었고 거기는 야자나무가 줄지어 섰으며, 바로 그 부분에서 부연 물안개가 일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강물들도 서로 그렇게 만남의 인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들어가지요."
두두가 젖은 손을 닦고 말에 올랐다. 소년은 말 등에 앉아서도 멋진 자세를 잡으려고 허리를 쭉 펴는 등, 한참 태를 부린 후에야 출발을 했다. 하긴 이곳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천리마를 탔으니 뽐을 내고 싶기도 할 것이었다.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앞은 초지거나 채마밭이었고 그 앞에는 또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자연조건이 아주 좋은 지대였다. 에인은 천천히 걸으며 주택들을 살펴보았다. 집들은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고 그 모양 또한 가지각각이었다.

흙벽에 나무를 걸친 작은 집이 있는가 하면 텔을 뒷벽으로 빙 둘러가며 연립 식으로 지어진 집들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앞 초지에는 양들이 많은데도 그 양을 쫒거나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에인은 문득 궁금해졌다. 여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그들은 무슨 말을 사용할까?


"이 집이에요!"
흙벽돌에 통나무 이엉을 올린 제법 큰 집 앞이었다. 두두는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안에 대고 사람을 불렀다. 곧 두두의 외할머니가 나왔다. 약재를 다룬다는 그 할머니였다. 머리를 똬리로 땋아 올린 것이나 가무스레한 얼굴에 눈썹이 짙은 것은 동방사람과 달랐지만 그 미소는 소호의 할머니들처럼 퍽 다감해 보였다.

"이게 누구야? 두두 아닌가?"
"예, 할머니 귀한 손님과 함께 왔어요."
"그래, 잘 왔다 어서 들어오렴."
두두가 에인에게 말했다.


"장군님부터 먼저 들어가세요. 전 말들을 마구간에 넣고 올께요."
"천둥이는 마구간이 따로 필요 없는데?"
"여기 있으면 사람들 눈을 타게 되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지요. 더욱이 밤엔 비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두두는 말 두 마리를 끌고 집 옆으로 돌아갔다. 마구간은 거기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에인이 두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멀거니 서있자, 할머니가 그를 불렀다.
"청년은 먼저 안으로 들어오시구려."

에인은 할머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대청마루만한 거실이 있었고 그 거실 왼편으로는 방들이, 그 오른 편은 안으로 들어가는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할머니가 거실 왼편의 구석진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서 잠깐 앉아 계시구려."
그리고 할머니는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안에 부엌이나 약제실이 있는 모양이었다.

에인은 할머니가 일러준 방의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엔 침대 두 대가 벽 쪽에 붙어 있었고 그 외엔 앉을만한 의자도 없었다. 그러나 토단으로 올린 침대 위에 양피가 깔려 있어 에인은 그 위에 앉았다. 포근했다. 진종일 말을 탄 데다 수면부족까지 겹쳐 누우면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별안간 목이 말랐다. 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할머니가 들어간 복도 앞을 기웃거려보았으나 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여오지 않았다.
"장군님 왜 거기 계세요?"
그때 두두가 들어오며 물었다. 에인이 등을 돌리며 되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지금 환자를 받고 계시냐?"
"환자요?"
"안으로 들어가신 뒤 여태 나오지 않으셨다."
"아, 예. 기도 시간이라 그래요. 그러나 곧 끝날 거예요."
"기도?"
"이 지방 사람들은 해뜰 때와 해질 때 신께 기도를 드리지요."
"어디서?"
"여긴 약재 방에 신위가 있어요. 시간이 되면 식구 모두 그 방으로 가지요."

그러니까 할머니는 기도 도중에 손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나오긴 했으나 그 기도를 끝내기 위해 다시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에인은 비로소 마을 앞엔 왜 사람이 없었던지 이해가 되었다.
"하다면 이 지방 신은 누구냐?"
에인이 묻자 두두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집들은 모르겠구요, 우리 외가의 신은 하늘 신(천신), 환인, 환웅 신이지요. 신위도 그렇게 모셔져 있어요."
"그런데 하루에 두 번씩이나 기도를 올린다구?"
"하여간에 그 시간은 마을 전체가 기도 시간이니 할머니와 삼촌도 그렇게 따라 하는 거지요."

하루에 두 번…. 그러자 문득 자신은 너무 오랫동안 자기의 신들을 찾지 않았다는 것이 깨달아졌다. 별안간 마음 한쪽이 텅 비려고 했다. 물처럼 차있던 넋이 그렇게 삽시에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얼른 옆구리를 더듬어보았다. 다행히 지휘 검은 거기 있었다. 그건 잊지 않고 차고 나왔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비로소 비어버리려던 마음이 제자리로 되돌아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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