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72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01 09:36수정 2004.06.0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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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어두워졌을 때 두두의 할머니가 그들을 불렀다. 저녁을 먹으러 부엌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침대 하나씩 차지하고 나란히 누워 얘기를 하던 그들은 동시에 벌떡 일어나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둘 다 몹시도 배가 고팠던 것이다.


부엌은 복도를 끼고 들어가자 그 오른쪽이었다. 제법 널찍했고 화덕은 한가운데 있었다. 식탁은 또 화덕 둘레로 빙 돌려가며 토단을 쌓아올렸고 그 앞에는 의자용 통나무들이 놓여 있었다.

"앉으세요."

두두가 통나무 하나를 내밀어 주며 말했다. 화덕 앞에는 세 여자가 서서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중년 여성과 젊은 아가씨였다. 중년 여성이 화덕 위에 걸린 솥에서 삶은 양고기를 꺼내 썰기 시작하자 두두가 속삭였다.
"지금 고기를 써는 분이 이모에요."

그때 외삼촌 가족들도 들어왔다. 두 아들과 그의 아내였다. 그 아내는 부추를 씻어 와 화덕 앞으로 갔고 외삼촌과 아들들은 맞은 편 통나무에 앉았다. 두두가 서둘러 소개를 시켰다.

"외삼촌, 이분이 우리 장군님이셔요."
"이렇게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외삼촌이 반절을 올리며 인사를 했다. 에인도 답례를 하려는데 두두가 또 먼저 나서서 소개말을 챙겼다.
"외삼촌은요, 이 마을의 촌장님이셔요."


두두는 자기 외삼촌이 촌장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별안간 신세 끼치게 되었습니다."
에인도 그렇게 인사를 했다.
"신세라니요…."


그때 처녀가 양고기를 담은 접시를 촌장 앞에 갖다놓았다. 촌장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이게 무슨 버릇이냐. 손님 앞에 먼저 가져다 드려야지. 너도 알아두어라. 저분이 딜문을 되찾아주신 바로 그 장군님이시다."
그러자 처녀는 그것을 다시 들고 에인 앞에 가져다놓으며 생긋 웃었다.
"저애가 이모 딸 닌이구요."

처녀가 다른 사람 앞에도 접시를 나를 때 두두가 조그만 소리로 알려주었다. 귀염 상이었다. 환족이라 그런지 땋아 내린 머리도 검고 길어 친근감이 느껴졌다.

"자, 들어요."
할머니가 말했다. 양고기는 소금만 넣고 삶은 것 같은데도 그 맛이 독특했다. 한창 배가 고프던 참이라 에인은 그 고기 접시를 다 비웠고 국물에 생 부추를 띄운 수프까지 남기지 않았다.

"그래, 며칠간 계실 예정이십니까?"
두두의 외삼촌이 물어왔다. 두두가 대답했다.
"우린 여행길에 올랐어요. 여긴 하룻밤만 들린 것이구요."
"오, 그래?"
"우바이드와 에리두까지 다 돌아볼 작정이에요. 사람들도 만나 보구요."
외삼촌이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에인에게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암요, 반드시 보고 와야 할 곳이지요."
그때 별안간 이모의 탄성 같은 말이 끼어들었다.
"정말 잘생겼다…."

그 느닷없는 말에 에인은 좀 놀랐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아마 이모는 두두가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참지 못하고 그런 말을 던진 모양이었다. 대개 환족 이모들은 조카들을 그렇게 추어올리길 좋아했다. 자기 이모도 그랬다.

한데 별안간 또 두두가 킥킥거렸다. 에인이 그제서야 주위를 살펴보았다. 두두의 이모는 두두가 아닌 에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 또한 그윽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답례를 해야 되는지 알지 못해 에인이 두리번거리자 외삼촌이 입을 열어 그 어색한 분위기를 정리했다.

"장군님, 이 내륙에는 우리 환족도 인구가 많은 편입니다.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구요. 지금은 모두 자리를 굳히고 있으니 언젠가는 딜문도 에리두만큼 멋진 제국이 될 것입니다."

에인은 삼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닌이 어느 새 자기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는 자꾸만 웃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머나 먼 곳에서 온 손님은 처음 보는지라 닌은 호기심으로 그러는 것이겠지만 에인에게는 모든 것이 낯선데다 또 여러 상황이 한꺼번에 겹쳐지자 그만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좀 쉬고 싶은데 이만 물러가도 좋은지요?"
그는 그렇게 양해를 구했다.
"나도 쉬고 싶어요."
두두도 그의 역성을 들어 함께 일어나주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에인은 비로소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두두에게 물어보았다.

"이모의 남편 되시는 분은 식탁에서 못 뵌 것 같은데, 어디 외출하셨나?"
"아니오."
"그럼 안에 계셨던가?"
"돌아가셨어요. 지난번 변란 때요. 우리 옆집에 사셨는데…."

에인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더 물었다간 또다시 머릿속이 얼크러질 것 같았
다. 그는 허리를 쭉 펴고 침대에 누웠다. 편안했다. 그럼에도 두통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면 낯선 상황이 준 긴장 때문인지도 몰랐다. 잠이라도 푹 자고 나야 이 복잡한 긴장이나 두통이 사라질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여기 꿀물 가져왔어요. 식후에 그냥 자면 갈증이 날 수도 있다고 할머니가 마시고 자라는데…."
막 잠이 다가오는 순간 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인이 벌떡 일어났다. 닌이 그에게 꿀물 그릇을 넘겨준 후 두두에게 말했다.

"에리두에 간다면서? 분홍색 웨브(실크 같은 면) 좀 사다주겠어?"
"우린 시장에 가지 않아. 그런 건 다음에 부탁해."
두두가 딱 잘라 거절하자 닌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버지도 잃은 사촌한테 두두가 너무 매정하다 싶어 에인이 대신 물어보았다.

"웨브가 뭐지요?"
"천이에요. 여름에는 햇살이 너무 세서 머리 천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알았어요. 찾아보도록 할게요."
"고마워요."

닌이 그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그 순간 에인의 온몸이 저릿저릿했으나 그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감정인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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