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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생 농사만 짓다 숨을 거두신 여든두 살의 아버지. 3년 전 그날, 너무도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계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보았습니다. 부단히 움직이다가 이제 막 멈춰버린 그 손….
고목 껍질 같기도 했고, 시커멓게 타버린 듯하기도 했습니다. 깊은 주름살 사이사이로 곳곳에 남은 생채기들. 그것은 고단했던 이승에서의 삶의 흔적들이었습니다. 가슴 저미도록 슬프고도 아름다운, 여백 없이 꽉 채워진 삶의 무늬…. 저는 그 손을 천천히, 오래오래 어루만졌습니다.
몇 년전 화실에 그림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의 그 마지막 손이었습니다.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따뜻했던 그 손. 지워지지 않는 진한 유화로 여백 없이 꽉 차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정지된 캔버스 위에 영원히 남기고 싶었습니다.
2.
중년의 몸은 애틋합니다. 애틋하기에 또 아름다운 것이지요. 반쯤은 살아온 세월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고, 반쯤은 아직 미지의 여백으로 남아있는 그 중년의 몸.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한 늙음의 기미조차도 살아온 세월이 남긴 다채로운 삶의 무늬인 것을….
저는 제 손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이상하게 저는 손이 가장 먼저 늙네요. 벌써 손등엔 저승꽃이라 불리는 검버섯이 몇 개 보입니다. 그것은 고단했고 가끔 기뻤던 지난 삶의 흔적입니다. 저는 그 흔적을 천천히 오래오래 바라봅니다.
가늘고 섬세한 손금 어느 줄기쯤에 아직 젊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반쯤 완성된 미완의 그림, 중년. 아직 여백이 남아있기에 때로는 설렘으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그 여백 앞에 저는 서 있습니다.
제가 만약 사진 작가가 된다면 저는 그런 애틋한 중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뒤로는 지워지지 않는 빗물 고인 발자국 몇 개 보이고, 앞으로는 고갯마루 하나 보이는 어느 언덕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담배 한 대 물고 있는 중년의 한 남자. 혹은 눈가에 번진 잔주름을 바라보며 오래오래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중년의 한 여인. 그것은 또 얼마나 애틋하고 아름다울까요.
반쯤 채워졌기에 애틋한 나이, 중년. 아직 여백이 남아 있기에 아름다운 나이, 중년. 머지않아 곧 정지될 그 시간을 향해 부단히 움직이고 있는 살아있는 시간, 중년. 그 중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그 중년의 삶을 좀 다른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3.
저는 입버릇처럼 손자(손녀)를 빨리 보고싶다고 말합니다. 이제 스무살밖에 안 된 대학 2학년 아들놈이 왔을 때, "나는 증손자까지 보고 죽어야 되니까, 지금이라도 짝 찾아서 장가가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빠, 꿈 깨세요"였습니다.
저는 정말 손자가 보고 싶습니다. 손자가 생기면 장난감도 고르고, 동화책도 골라 줄 것입니다. 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온갖 자연의 소리를 집안에 가득 채워놓고 손자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잠이 들었을 땐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을 나지막하게 틀어놓고, 잠에서 깰 때 쯤에는 "다뉴브강의 잔 물결"을 틀어놓고 볼륨을 천천히 천천히 높여 가겠습니다. 맑은 날이면 야외로 데리고 나가서 흙의 감촉, 풀잎의 감촉, 바람의 감촉, 시냇물과 바닷물의 감촉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피곤에 지친 손자놈이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들 때면, 저는 손자의 손을 살포시 잡고 제 볼에 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앙증맞고 귀여운 손, 아직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순백의 그 손을 늙어가는 제 얼굴에다 대고 천천히 오래오래 부비고 싶습니다. 잠이 깰라 조심조심 천천히 눈을 감고.
어쩌면 그 때, 오래 전 놓치고 만,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 손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지요. 그 옛날 생채기 투성이로 얼룩진 아버지의 손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느꼈던, 그 따뜻한 온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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