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야 순이야, 장구 치고 나온나"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62> 나의 사랑스런 "달팽이 각시"

등록 2004.05.31 13:26수정 2004.05.3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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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어린 날 추억을 일깨우는 달팽이

어린 날 추억을 일깨우는 달팽이 ⓒ 이종찬

숙아 숙아
삶은 감자 줄게
북 치고 나온나
...


자야 자야
보리밥 물 말아 줄게
괭과리 치고 나온나
...

옥아 옥아
쌀밥 고두밥 줄게
징 치고 나온나
...

순이야 순이야
돈 십 원 줄게
장구 치고 나온나
쏘옥~

-이소리 '달팽이ㆍ1' 모두


얼마 전 제주도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긴다는 목사 김민수 기자의 '달팽이처럼 천천히 살고 싶습니다' 란 글을 읽고 달팽이를 찾아 나섰다. 마침 여름을 재촉하는 늦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어서 비음산 다랑이밭 근처를 얼쩡거리다 보면 달팽이 서너 마리쯤은 쉬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달팽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 어릴 때는 비가 오지 않아도 마을 근처 풀밭이나 파아란 탱자가 매달린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아침이슬을 털고 있는 달팽이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많던 달팽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창원공단이 들어서면서 달팽이마저도 깡그리 멸종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 어린 날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그 달팽이, 이름만 떠올려도 그때 그 아름다운 기억이 절로 묻어나는 그 예쁜 달팽이가 그렇게 사라졌을 턱이 없다. 비록 창원공단이 들어서면서 많은 것이 사라졌지만 내 마음에 묻어둔 달팽이에 대한 추억만큼은 결코 지울 수 없으리라.


그 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바지가랑이가 촉촉히 젖도록 비음산 기슭을 느릿느릿 헤집었다. 비음산 기슭에 층층히 얹힌 다랑이밭에서는 상치와 쑥갓이 잎사귀에 동그란 빗방울을 또르르 또르르 말고 있었다. 무논에서는 뒷다리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참개구리들이 동그란 눈망울을 물 위에 내밀고 꾀르륵 꾀르륵 울었다.

a 달팽이의 집은 집이 아니라 뼈의 일부다

달팽이의 집은 집이 아니라 뼈의 일부다 ⓒ 이종찬


a 우리들은 달팽이를 바라보면서 우렁각시를 떠올렸다

우리들은 달팽이를 바라보면서 우렁각시를 떠올렸다 ⓒ 이종찬

그 때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비음산 발치에 있는 그 좁다란 계곡은 늘 응달이 져서 비가 오지 않아도 축축한 습기가 차 있었고, 바위에는 연초록 이끼까지 끼어있는 곳이었다. 그래. 달팽이는 사방이 확 뚫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다랑이밭보다 약간 음습한 그곳에 숨어있지 않겠는가.

나는 우산을 고쳐 잡고 느릿느릿 그곳으로 향했다. 그래.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 그곳에마저 달팽이가 없다면 분명 창원의 달팽이는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내 고향 창원은 이제 달팽이마저 살 수가 없는 도시, 오로지 사람만이 아둥바둥대며 살아가는 그런 삭막한 도시로 변해버린 것이 틀림없다.

각시야 각시야
사카린보다 더 달고 맛있는 눈깔사탕 줄게
어서 북치고 장구 치며 나온나


그랬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 창원은 아직 죽지 않고 옛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리고 있었다. 파랗게 이끼가 낀 바위 주변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팽이 서너마리가 느릿느릿 기어다니고 있었다. 어린 날, 우리들이 부르는 노랫소리 따라 길쭉하고도 까만 눈망울을 뾰쭘히 내밀던 그 달팽이처럼.

내 고향마을에는 달팽이가 참으로 많았다. 이른 아침 학교로 가는 신작로 옆 이슬이 총총 맺힌 풀밭에도 여러 마리 달팽이가 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느릿느릿 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달팽이집을 잡는 순간 달팽이는 이내 까만 두 눈망울을 달팽이집 속으로 쏘옥 숨겼다.

그 때 우리들은 알록달록한 달팽이집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한동안 노래를 부르다 보면 달팽이집 속에 쏘옥 숨었던 달팽이가 천천히 알몸을 내밀며 길쭉하고도 까만 눈망울을 뾰쭘히 내밀었다.

하지만 몸을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달팽이는 순식간에 자기 집속으로 오므라 들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달팽이집을 바라보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어서 달팽이가 집에서 쏘옥 빠져나와 동화 속에 나오는 우렁각시처럼 우리들에게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한상 가득 차려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각시야 각시야
니 신랑 배고파 죽것다
북치고 장구 치며 나온나

각시야 각시야
니 집 깨뜨리지 않을게
징치고 괭과리 치며 나온나

각시야 각시야
알콩달콩 같이 살며 모를 심자
아들 모 딸 모 가리지 말고 모를 심자

각시야 각시야
니 신랑 도망 간다
연지 곤지 찍고 어서 나온나

-이소리 "달팽이ㆍ2" 모두


a 달팽이는 어릴적 우리들의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달팽이는 어릴적 우리들의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 이종찬


a 각시야 각시야, 신랑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각시야 각시야, 신랑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 이종찬

하루는 그렇게 달팽이를 가지고 놀다가 그만 학교에 늦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한번도 학교에 지각하거나 결석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혹 머리가 어지럽고 배가 아파도 어머니께서는 반드시 학교에 가게 했다. 그 때 내 어머니께서는 끼니를 거르면 몸에 탈이 나고 학교를 거르면 마음에 탈이 난다고 하셨다.

"그나저나 인자(이제) 클(큰일)났다. 이 일로 우짜것노."
"이기 다 이 놈의 달팽이가 아까부터 저거 집에서 나오다 안 하고 애로(애를) 먹였기 때문 아이가. 에이~ 망할 달팽이 녀석 같으니라고."
"어어~ 니 그렇다꼬 죄없는 달팽이로 땅바닥에 패대기 치모(내려치면) 우짜노. 우리 옴마(엄마)가 그라던데 달팽이 각시로 죽이모 나중에 커서 장개(장가)도 못가고 총각귀신이 된다 카더라."


그랬다. 그 날 나와 동무들은 달팽이를 학교 탱자나무 울타리에 내던지고 허겁지겁 교실로 들어갔다. 그때 출석부를 든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내 번호는 그때까지 부르지 않고 있었다.

"이종찬!"
"네에."
"허어~ 요 맹랑한 녀석 좀 보게. 겨우 턱걸이를 해서 지각을 면하기는 했네. 그래, 왜 늦었나?"
"달팽이 땜에 그랬습니더."
"뭐라꼬? 달팽이 때문에 늦었다고? 와(왜) 달팽이가 학교 가는 길을 막더나? 아니모(아니면) 달팽이가 니캉(너와) 같이 땡땡이 치자 카더나?"
"그…그기 아이고예."


그 날 나와 동무들은 1시간 동안 흑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치켜들고 있어야 했다. 조금 지나자 팔과 무릎이 몹시 아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은 손바닥도 맞지 않았고 지각처리도 되지 않았다. 평소 담임선생님께서는 지각을 한 아이들에게 손바닥을 몇 대 때린 뒤 벌을 세우셨지만.

그렇게 30분 쯤이 지나고 치켜든 팔이 저절로 머리 위로 자꾸만 내려올 때였다. 근데 갑자기 목 뒷덜미가 간질간질했다. 나는 흑판에 하얀 분필로 글씨를 쓰고 있는 선생님의 눈치를 보아가며 슬며시 목덜미에 손을 갖다댔다. 그때 무언가 미끌미끌한 것이 손에 닿더니 이내 내 등짝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아~"
"누…누구야!"
"으으~"


a 달팽이는 등껍질이 부서지면 이내 죽는다

달팽이는 등껍질이 부서지면 이내 죽는다 ⓒ 이종찬


a 민달팽이는 조금 징그럽다

민달팽이는 조금 징그럽다 ⓒ 이종찬

나는 후다닥 일어섰다. 그리고 웃도리를 치켜올려 몇 번이나 털었다. 갑작스레 일어나 온몸을 비틀며 허둥대는 나의 이상한 행동에 담임선생님과 반 아이들의 눈이 달팽이의 까만 눈망울처럼 크게 휘둥그레졌다. 그 때 발 아래 동그란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그게 뭐야?"
"다…달팽이라예."
"허어~ 인자(이제) 니 혼자 학교 댕기는(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달팽이까지 데리고 나오나. 니는 다음 달에 기성회비 낼 때 달팽이 몫까지 같이 갖고 온나, 알것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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