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 보릿고개를 아십니까?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61> 공장일기<36>

등록 2004.05.28 13:44수정 2004.05.2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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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84년 당시, 같은 공장에 다니며 간부들 몰래 문학활동을 했던 문학동인들

1984년 당시, 같은 공장에 다니며 간부들 몰래 문학활동을 했던 문학동인들 ⓒ 이종찬

1984년, 그해 여름은 창원공단 현장 노동자들도 지독한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S라디에타에서 사내 모범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경력이 있었던 윤경효씨의 고발장이 노동부로부터 부당노동행위의 구체적인 위법 사실이 없다며 사건을 종결 처리한다는 답변서가 돌아오자 사측에서는 기세가 더욱 등등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다른 지역에 있는 자매회사로 부당전출을 당했다가 다시 창원공장으로 돌아왔던 윤경효씨는 또다시 자매회사로 전출되었다. 윤경효씨는 사측의 억압이 더욱 심해지자 혼자 싸워 나갈 힘을 잃고 마침내 S라디에타를 자진사퇴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윤경효씨에게는 불순분자란 꼬리표가 붙어다니며 다른 공장에 취직을 할 수도 없었다.

S라디에타 노조 설립이 그렇게 무산되자 창원공단에 입주한 각 공장에서는 서둘러 반장급 이상으로 구성된 어용노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현장노동자들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사측에서 공인한 현장노동자들의 낚시회나 등산회는 물론 동창회의 임원진까지 철저하게 파악했다.

게다가 사측에 조금만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현장노동자가 눈에 띄면 적당한 핑계를 삼아 시말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시말서를 세번 쓴 현장노동자들에게는 전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부서로 보내거나, 심한 경우에는 다른 지역에 있는 자매공장으로 가차없이 전출을 보냈다.

오뉴월 보릿고개는 똥구녕 찢어져라 가난한 시골에서 늙으신 부모님들만 겪는 게 아니었다. S라디에타 노조가 와해되면서 창원공단 현장노동자들에게 찾아온 공단 보릿고개는 오뉴월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와도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니기미! 요새는 밥도 함부로 묵으로(먹으러) 갈 수 없다카이. 배가 고파서 1분만 일찍 식당에 달려가도 공장 간부들이 일일이 이름을 적는다카이."
"그라이(그러니까) 억울하모 출세로 해라카는 유행가까지 안 있더나. 그라고 니도 글마들(공장 간부)하고 똑 같다카이. 배가 고파도 쪼매 참으모 되지, 뭐한다꼬 글마들하고 티격태격 하노. 그라이 글마들이 우리들을 아예 물컹하게 본다, 아이가."


그랬다. 당시 내가 다닌 공장의 점심 시간은 12시 30분에서 1시 30분까지였다. 하지만 매일 아침마다 분임토의니, 대청소니, 보건체조니 하면서 아침 7시 30분까지 공장에 나와야 했던 현장노동자들은 대부분 아침을 거른 채 서둘러 출근을 해야만 했다. 그런 까닭에 오전 내내 로롯처럼 쉬지 않고 제품을 생산하는 현장노동자들이 점심 시간까지 기다리기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그 당시 현장노동자들은 점심 시간 2~3분 전에 화장실 주변에서 서성대다가 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식당을 향해 마구 내달렸다. 그래야만이 20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고 점심 식사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렇게 재빨리 점심을 먹어야 나머지 시간에 잠시 눈을 붙힐 수가 있었다.

"내 참 더러바서(더러워서) 정말 못 살것네. 아, 저거들은 밥도 안 처묵고 사나?"
"와(왜) 또. 한달 동안 도장반에 가서 일해라 카더나. 그라이 내가 평소에 뭐라카더노. 절마들한테 꼬투리 잡힐 일은 아예 하지 마라 안 카더나."


근데 그것조차도 공장 간부들 몇몇이 식당 주변에 은밀히 숨어있다가 단속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장 간부들은 시계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제일 먼저 달려오는 현장 노동자 몇몇의 부서와 이름을 은밀하게 적어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가 그런 행동이 몇차례 더 반복되면 부서장에게 연락, 사유서를 내게 했다.


그렇게 세번 사유서를 낸 현장노동자들에게는 일정한 벌칙이 주어졌다. 공장에서 가장 열악한 부서, 즉 페인트를 칠하는 도장반이나 제품의 광을 내는 연마반 같은 부서에서 한달 동안 근무하게 했다. 당시 도장반이나 연마반에는 고정된 현장노동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늘 문제가 있는 현장노동자들이 임시로 일하는 그런 부서였다.

"아나! 선물이다."
"선물? 오늘이 머슨(무슨) 날이가? 내 생일도 아인데(아닌데)…."
"나중에 집에 가서 니 혼자 살짝 뜯어 봐라. 그거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아주 귀한 선물이다."
"가만! 에이, 이거는 책 아이가. 울매고?(얼마냐)"
"2000원인데 돈은 월급날 주모(주면) 된다. 니 내가 주는 책이 머슨(무슨) 책인 줄 잘 알제?"


그해 겨울, 그러니까 12월 중순에 마침내 1년에 한번씩 부정기적으로 나오는 <마산문화> 3집 <전진을 위한 만남>이 나왔다. <마산문화> 3집에는 지난 오뉴월에 있었던 S라디에터 노조 와해 사건을 상세하게 다룬 'S라디에타 노조의 외로운 몸부림'이란 글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책을 판매할 곳이 없었다. 대부분의 서점에서는 <마산문화>를 불온서적이라 하여 매장에 전시하기를 꺼려했다. 그런 까닭에 <마산문화>의 판매처는 사회과학서적을 전문으로 다루는 일부 서점과 대학가에 있는 몇몇 서점뿐이었다. 책을 만드는 것도 판매하는 것도 모두 <마산문화> 팀 구성원들의 몫이었다.

그때 내게는 <마산문화> 3집이 스무권쯤 맡겨졌다. 나는 그 책 한권 한권을 예쁜 종이에 포장을 한 뒤 공장에 들고 가서 문학동인들과 절친한 동료들에게 은밀하게 팔았다. 아니, 팔았다기보다는 억지로 마구 떠맡겼다. 공장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책을 꺼내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어? 이기 머슨(무슨) 이야기고. 지난 여름에 있었던 S라디에타 노조 이야기 아이가. 이야~ 상세하게도 적어놨네."
"쉬이~ 내가 뭐라카더노? 공장 안에서는 절대로 읽지 말고 집에 가서 읽어봐라 안 카더나?"
"괘않타 고마. 이 책을 읽다가 간부들한테 들킨다꼬 캐서(해서) 내가 이 책을 니한테 받았다꼬 불 거 같더나. 택도 아이다(어림 없다). 아무리 지랄병을 틀어도 내는 고마 서점에 가서 샀다 할끼다(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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