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갑니다'를 '감니다'로 발음하죠?"

한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어느 유학생의 반성

등록 2004.05.31 17:21수정 2004.06.01 21:2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몇 년 전 베를린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곳의 한인 2세들을 위한 한글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회가 되면 '교사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한글을 가르치고 싶었던 이유는 한국과는 다른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태어나 또 하나의 '모국어'인 한글을 배우려고 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저에게 무척 소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빠듯한 유학 생활에 다소나마 경제적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현실적 이유도 물론 빼놓을 수 없지만요.

a 열심히 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학생들. 왼쪽이 문제의 '모범 학생'

열심히 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학생들. 왼쪽이 문제의 '모범 학생' ⓒ 강구섭


그러던 중 기회가 닿아 올해 1월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맡게 된 반은 아이들 반이 아닌 새롭게 생긴 어른 반이었습니다. 성인을 위한 기초 과정이었는데 주 1회 2시간 반, 총 9회의 수업을 통해 한국어의 '기본'을 완성해 주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조금 긴장된 기분으로 들어간 첫 수업에는 한국인 부인을 둔 오, 육십대의 독일인 두분, 한·독 가정에서 자란 30대 여자 직장인, 한국인 여자 친구를 둔 독일인 남학생, 그리고 옆방 친구가 한국인이었고 외국어에 관심이 많다는 독일인, 이렇게 총 5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우선 간단히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두 달의 한국어 코스를 통해 이룰 것에 대한 기대치, 현실적 목표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첫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첫 시간과 그 다음 주의 둘째 시간까지는 한글 자모음을 익히는 데 주력했고, 그림을 그려가며 그런 대로 무난하게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자모음을 모두 배우고 떠듬떠듬 읽기가 시작되자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왜 '갑니다'를 '감니다'로 발음을 해야 하죠? 왜 '깨끗한'을 '깨끄탄'으로 T 발음을 하는 거예요? '깨끄ㅅ한'으로 발음해야 하는 거 아니예요?”


처음에는 그럭저럭 대답을 했는데 차츰 질문이 늘어나면서, '머리털나고 지금까지 써 온 한국말이 이렇게 복잡한 것이었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의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 주기에는 초보 한국어 선생의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늘상 독일어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한국어는 자신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본토 출신' 한국어 교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신통치 않은 대답에 끼리끼리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급기야 제 머리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그 외국어에 관심이 많다는 친구가 문제(?)였습니다. 직업이 의사라는 그 친구는 제 가르침(?)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다른 한국어 책을 구해 독습을 하더군요. 그리고는 독어 문법과 비교해 가며 수업시간 초반에 궁금한 것을 더욱 열심히 질문했습니다.

다른 책까지 구해 열심히 공부하는 그 열성은 당연히 높이 살 만했습니다. 하지만 토씨 하나까지 물어대는 그 친구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정말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충 넘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니까 코스를 잘 마치고 기존의 성인반에 합류할 수 있게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저의 부담감은 남달랐습니다. 독일에서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스스로 찾아온 사람들에게 한국어,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쏟아지는 질문에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교무실에서 국어 교과서를 비롯한 몇 가지 책을 가져다 타국 만리 베를린에서 때 아닌 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a 거의 20년 만에 다시 만난 낯익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

거의 20년 만에 다시 만난 낯익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 ⓒ 강구섭

틈틈히 국어책을 들여다 보면서 제 국어 실력의 빈곤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발음이나 문법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의사 소통을 넘어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인 우리말을 지금까지 적당히 말하고 써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20년 이상 영어를 공부했고 지금은 독일어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말을 바르게 쓰고 말하기 위해서는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말하는 것에는 그다지 거리낌이 없으면서, 순 우리말을 배우고 말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적지 않은 반성이었습니다.

a 나를 적지 않게 '괴롭혔던' 학생이 직접 만든 기초 한국어 회화 자료. 이것을 갖고 직접 문장을 만들어 말하며 아주 뿌듯해했다.

나를 적지 않게 '괴롭혔던' 학생이 직접 만든 기초 한국어 회화 자료. 이것을 갖고 직접 문장을 만들어 말하며 아주 뿌듯해했다. ⓒ 강구섭

몇 년 전 독일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고 독일어를 배울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한국어) 일상 언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외국어로 오염되어 있는 것 같다는….

굳이 국제화 시대라고 하지 않더라도 외래어,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한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정황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필요 이상으로 외국어가 남용되고 있고, 또 '세계화'라는 이유로 그것이 더 부추겨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필요에 따라 외국어 실력을 기르기 위해 애쓰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요. 하지만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과다 사용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외래어와 외국어들을 가능한 한 우리말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정체 불명의 외래어, 외국어를 사용하기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고 말하는 것이 더 가치있게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2. 2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3. 3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4. 4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5. 5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