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거북이를 응원하다

날 꼭 닮은 거북이, 그의 성공을 돕다

등록 2004.06.01 18:06수정 2004.06.01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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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난생 처음 부천 중앙 시민공원을 찾았다.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작은 아버지, 사촌 동생과 농구를 하면서 잠든 근육을 단련시켰다.


운동을 끝마친 뒤, 우리는 팝콘을 들고 공원 안의 호수로 향했다. 호수 안에는 몸길이 20cm의 붕어들이 바글바글거렸다. 붕어 세상이었다. 호기심 삼아 팝콘을 호수 안에 투입하자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붕어들이 벌떼 같이 모여든 것이다.

팝콘은 붕어떼의 습격에 의해 파손되어 부스러기를 만들었다. 붕어들은 서로 등에 올라타는 등 엉키면서까지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치열한 생존 경쟁이었다.

달콤쌉사름한 먹잇감에 곧 거북이와 몸길이 1m를 웃도는 잉어 가족이 나타났다. 잉어는 붕어들의 조잡한 투쟁을 육중한 몸집을 휘둘러 제압한 뒤 팝콘을 넙죽 받아 먹었다. 특히 붕어들이 해결하기 힘든 과자를 먹기도 했다. 잉어는 한 아기가 던진 둥글 넓적한 뻥튀기를 토막낸 뒤 조각을 삼키는 장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잉어는 몸집이 무거워서인지 자주 수면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반면 붕어는 몸집이 작고 가벼워서 수면 위로 자주 접근했다. 당연히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붕어에게 더 많았다.

잉어의 수면 위 부상 "아기가 던진 과자를 입에 물다." 우측 아래-허탕 친 거북이, 잉어를 응시
잉어의 수면 위 부상 "아기가 던진 과자를 입에 물다." 우측 아래-허탕 친 거북이, 잉어를 응시이충민
반사 신경 둔한 거북이


반면 거북이는 자신의 먹잇감을 전혀 챙기지 못했다. 재빠른 붕어와 힘 좋은 잉어와는 달리 거북이는 과자를 쟁취하는 데 별다른 특기가 없어 보였다. 반사 신경도 둔하고 몸싸움에도 밀려나는 거북이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거북아, 넌 물 속에서도 둔하기는 마찬가지 구나."

난 거북이 앞으로 과자를 던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바람에 잘 휩쓸리는 팝콘은 의도한 지점에 던져지지 않았다. 어찌할까 하다가 바람이 부는 방향의 흐름을 거슬러 팝콘을 던지는 꾀를 냈다. 다행히 어쭙잖은 지략은 용케 맞아 떨어졌다. 팝콘은 바람의 영향을 받아 커브 곡선을 그리며 거북이 앞에 안착했다.


하지만 거북이는 팝콘을 챙기지 못했다. 붕어떼가 가로챘기 때문이다. 붕어가 밉상으로 보이기는 처음이다. 거북이에 대한 나의 연민은 더해만 갔다. "거북이, 이 녀석아. 좀 먹어라. 너도 먹어야 살지."

거북이, 붕어 떼에 과자를 빼앗기다. 또 허탕!
거북이, 붕어 떼에 과자를 빼앗기다. 또 허탕!이충민
은근히 속도 상했다. 신경이 둔한 거북이를 보면서 나는 동질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거북이는 꼭 내가 비쳐진 거울 같았다.

나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대 사회에서 느림보 거북이었다. 1년 이상을 취업 준비생으로 허송 세월 보냈다. 속된 말로 백수다. "팝콘 하나 제대로 못 먹는 거북이 때문에 자괴감까지 들 줄이야…."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기가 샘솟았다. 거북이가 기필코 팝콘을 먹게 하리라.

가능성은 희박했다. 내가 직접 우물에 팝콘을 들고 뛰어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또다시 어쭙잖은 꾀를 내었다. 이른바 우매한(?) 붕어떼의 시선 유도다. 팝콘 부스러기를 대량 투하하여 붕어떼를 한쪽으로 유인한 뒤, 동작이 굼뜬 거북이가 홀로 남았을 때 팝콘을 던지기로 마음 먹었다. "실행!"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나의 의도는 또 빗나가고 말았다. 우매한 거북이는 팝콘 부스러기와 함께 붕어와 잉어가 모여 있는 곳으로 헤엄쳐 갔다. 자신의 코 앞에 있는 큼지막한 팝콘은 잊은 채 말이다. 결국 거북이는 그곳에서도 팝콘을 먹지 못했다.

얼마 후 팝콘을 맛보지 못한 거북이가 나에게 다가와 얼굴을 내밀었다. "줘도 못 먹는 녀석이 염치없기는…."

하지만 우리 수중의 팝콘은 이미 동이 난 상태였다. 거북이는 실속 없이 헤엄만 친 탓에 몹시 배가 고팠을 것이다. 애처로운 마음에 옆에서 구경하던 아기가 먹다가 떨어뜨린 과자에 손을 댔다. "이게 마지막이다. 거북아! 못 먹어도 날 원망마라!"

과자를 힘껏 던졌다. 던지면서도 붕어떼의 습격이 우려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붕어들이 설치는 와중에서도 거북이가 기어코 과자를 '덜컥' 문 것이 아닌가. 붕어들이 경거망동하는 와중에 어부지리로 거북이 입속에 과자가 들어간 것이었다. "이제서야 하나 받아 먹다니…. 거북이가 날 감동 시키는구나."

오리떼 등장, 분위기 파악 못해

거북이는 붕어들의 훼방을 뿌리치고 방향을 360도 턴했다. 한적한 곳으로 헤엄쳐 가서 과자를 맛 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오리가 나타났다. 오리는 거북이가 간신히 입에 문 과자를 두 동강 내어 입에 물었다. 나눠 먹자는 심보였다.

호수 위 난동꾼, 오리 떼 등장
호수 위 난동꾼, 오리 떼 등장이충민
어찌 되었건 간에 이것으로 임무 완성이다. 거북이가 나의 마지막 과자를 먹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사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인생의 승리자 아니던가. 팝콘의 대부분을 붕어가 가로챘지만 적어도 마지막 남은 과자는 거북이 뱃속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붕어 떼는 성과 없는 몸놀림만 행했을 뿐이다. 붕어가 생각할 줄 아는 요물(?) 이었다면 민망했을 것이다. "느림보 거북이에게 과자를 빼앗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걸?" 거북이의 시행착오 끝의 승리다.

기회는 온다. 거북이와 나, 현대 사회의 느림보지만 한 발 한 발 정직히(?) 내딛겠다. 결코 서두르지 않겠다. 삶의 기능공(?) 붕어와는 차별되게 살고 싶다. 물질적으로 궁핍하더라도 심신은 든든하고 맑게 삶의 참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따라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가 귓속을 파고 든다.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꿋꿋이 나의 길을 가련다.

날렵한 붕어 떼의 생존 경쟁
날렵한 붕어 떼의 생존 경쟁이충민
날 바라보는 거북이 "배고파"
날 바라보는 거북이 "배고파"이충민
거북이, 드디어 과자를 물다
거북이, 드디어 과자를 물다이충민
거북이, 과자를 물고서 360도 턴 줄행량
거북이, 과자를 물고서 360도 턴 줄행량이충민
분위기 파악 못하는 오리, 거북이의 과자 반 토막 내다! "나눠 먹자"
분위기 파악 못하는 오리, 거북이의 과자 반 토막 내다! "나눠 먹자"이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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