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76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07 09:04수정 2004.06.07 09:04
0
원고료로 응원
5

제후는 기가 막혔다. 자신은 이제 떡 마차를 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떡도 마차도 달아나버렸다. 그는 뒷짐을 지고 한길을 뱅뱅 돌았다. 반드시 수락해야 할 에인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저렇게 도망을 가다니…. 이 계획을 위해 얼마나 공력을 들였는데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진단 말인가.

처음부터 딜문은 회복시킬 방도가 없었다. 돌아온 주민들도 거의 빈털터리에다 원조를 부탁한 이웃부족에서도 전과 같은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침략이나 당하는 조그만 부족국가에 뭘 보고 도와주느냐는 식이었다.


다른 도시에서 부를 이룬 환족들도 고개를 저었다. 누주에서 목장을 가진 전 장년회장은 완전히 아슈르 인으로 동화되어 자신은 여기에 뿌리를 박고 싶다, 양이 3천수쯤으로 늘어나면 그때 원조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만난 사람마다 그의 자존심만 한웅큼씩 잡아 뜯을 뿐이었다. 기세등등하던 전날의 제후는 이미 가뭇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제후다. 제후는 또 무엇인가? 환족의 대표다. 환족의 대표가 무시를 당하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그 종족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럴 수는 없다. 수백년 동안 뭉쳐왔던 종족이 여기에서 깨어질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 전쟁이다! 나에겐 아직도 에인의 기마병이 남아 있지 않은가? 기마병이면 부족국이 아닌 도시도 침략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도 도시국가를 가질 수 있다. 얼마나 부러웠던 도시국가냐! 환족이 이 지방에서 도시국가를 가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러나 에인은 전쟁이라면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신기를 가진 왕손이 본때 있게 그 힘을 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서 돌아가지 못해 끙끙 앓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혼자 대월씨 국을 찾아가 별읍장을 알현했다.

'별읍장님, 제가 이렇게 온 까닭은 아직도 인근 부족 국에서 딜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선수를 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서 찾은 딜문을 도로 잃을 수도 있으니, 부디 다시 군사를 보내 주셔서 환족의 힘을 보여주십시오.'

별읍장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군사 문제는 재상과 상의를 해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것이고, 그 사이 자신이 직접 에인에게 당부를 해놓겠으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별읍장은 약속을 지켰다. 한 대상을 통해 에인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그는 그것까지 확인한 후 대원이국으로 말을 사러 갔다. 그가 암컷 천리마를 산 이유도 사실은 에인의 말이 수컷이었고, 그러면 두 천리마가 새끼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에인이 말도 잡아둘 수 있겠다는 계산에서였다.


별읍장이 어떤 내용의 서한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돌아와 보니 에인은 달라져 있었다. 청년 주민들을 모아 창던지기와 활쏘기를, 소년들에겐 막대기싸움과 비석 던지기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는 흡족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어갔다. 그러다가 이제 에인에게 필요한 것은 현장답사라고 생각한 날 그는 이 여행을 주선한 것이었다.

'저, 장군님, 두두가 외가에 갑니다. 이참에 장군님께서도 함께 여행이나 하시면 좋지 않을까요?'


뜻밖에도 에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는 '두두 그 녀석 보기보다 영특하다, 멋진 곳을 다 보여줄 것이라, 외가집고 잘 살아서 대접을 잘해줄 것'이라고 둘러댔고 그래도 별로 내켜하지 않자 이번엔 참모들이 부추기고 나섰다.

'그렇게 하십시오, 장군님. 사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여행해보시겠습니까? 귀국한 뒤에는 다시 오고 싶어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바람도 쏘일 겸 이참에 한바퀴 돌아보고 오십시오.'

그러자 에인이 제후에게 물었다.
'그럼 이 여행이 며칠이나 걸리오?'
'천리마들이 있으니 넉넉잡아도 닷새면 충분하실 것입니다. 그것도 길다면 중간에 돌아오셔도 되구요.'
'그럼 그렇게 하리다.'

에인이 수락하자 그는 또 얼른 '이왕에 가시는 길에 아가데즈, 니푸르, 슈르파크 등 다 돌아보고 오십시오. 두두가 다 안내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에인이 되물었다.
'거긴 또 어디요?'
'모두 두두의 외가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또 에리두 근처에 있는 우바이드는 큰 도시국가일뿐더러 거기 청동거울을 만드는 전문인이 또한 환족입니다.'

흥, 도시국가와 청동거울이란 말에 귀까지 솔깃 해놓고는, 또 그렇게 돌아보고는 이제와서 그것이 아니라고 달아나? 그때 문득 닌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장군께서 웨브를 사다준댔어요. 두두는 싫다고 했지만 장군께선 사오신댔어요.'
그는 급히 말에 올랐다. 그는 지금 니푸르에 있을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2. 2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3. 3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4. 4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5. 5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