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입구의 부도밭안병기
여염집이나 절집이나 손님으로 찾아가게 되면 웃어른부터 뵙는 게 당연한 순서일 터. 먼저 절 들머리 왼쪽 산자락 야트막한 곳에 자리 잡은 부도밭으로 간다. 문화재자료 제80호로 지정된 이곳은 취봉당혜찬대사지도(翠峰堂慧燦大師之屠) 등 9기의 부도가 한 줄로 정연하게 서 있다. 별 다른 조각이나 문양 없이 소박한 형태로 서 있는 이 부도들은 마치 내게 "삶에 애써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남기지 말라"고 충고하는 듯싶다.
이윽고 부도밭을 돌아 나와 절집으로 찾아간다. 맨 먼저 객(客)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절 둘레를 둘러싼 꽤나 긴 석축이다. 석축 위에는 사람들의 희망과 비원을 쌓아 올린 올망졸망한 돌탑들이 있어 심심파적 볼거리를 던져준다.
석축과 석축 사이로 난 돌층계를 오르면 지리산 쌍계사, 수도산 쌍계사와 더불어 청구삼쌍이라 일컫는 불명산 쌍계사가 곧 바로 제 소박한 면모를 드러낸다. 그러고 보니 이 절에는 속(俗)과 성(聖),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가르는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다. 아마 유난히 화재가 잦은 이 절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당나라 고승 현사 사비스님이 이르시기를 "문 없음이 바로 해탈의 문이요, 뜻 없음이 도인의 뜻"이라 했다던가. 그렇다면 시방 문지방 없는 문을 넘어 선 난 부지불식간에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셈인가.
쌍계사의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보물 제108호인 대웅전을 비롯해 부처의 뛰어난 제자인 16나한을 모신 나한전과 명부전, 칠성각과 봉황루, 영명각, 요사채 등이 있을 뿐이다.
▲대웅전안병기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장엄한 불전 대웅전
돌축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은 대웅전 건물은 겹처마 팔작 다포집이다.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그대로 초석으로 사용한 덤벙주초 위에다 둘레가 3척이 넘는다는 느티나무를 가지만 쳐낸 듯 더 이상 다듬지 않은 채 세워놓은 듯이 보이는 민흘림 기둥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고 자연스런 아름다움에 젖게 한다.
▲대웅전 귀공포안병기
다른 기둥의 재질이 느티나무인 것과는 달리 이 대웅전의 오른쪽으로부터 3번째 기둥은 칡덩굴로 만든 것이라는데 노인들이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아무튼 민흘림 기둥 위에다 창방과 평방을 짜돌리고 그 위에 다시 외사출목 내오출목의 다포식 공포를 배열하였다.
▲빗국화꽃살문안병기
▲솟을모란꽃살문(어간)안병기
▲빗모란연꽃살문안병기
길상의 상징인 꽃살문의 아름다움
대웅전 문짝은 한 칸에 두 짝씩 모두 열 짝으로 되어있는데 모란, 연꽃, 국화 등이 조각, 채색돼 있어 우리 나라 사찰문이 가진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가운데 어간의 문 두짝은 솟을모란꽃살문이며 우협간(右挾間)과 좌협간(左夾間) 각 네 짝은 빗모란연꽃살문과 빗국화꽃살문으로 되어있다.
대웅전의 다섯 개 문 앞에 서서 꽃살을 바라보노라면 먼저 저절로 감탄을 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미적 쾌감으로 전율하게 된다.
대웅전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사바 세계가 아닌 부처가 계시는 극락정토에 속한다. 대웅전 안에는 왼쪽으로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가 차례로 모셔져 있는데 그 머리 위로는 각각 보궁형의 닫집이 있고 닫집의 처마 끝에는 '칠보궁', '적멸궁', '만월궁'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석가모니불의 닫집인 적멸궁안병기
적멸궁은 적멸위락에 든 석가모니불의 궁전이며 칠보궁은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극락정토를 의미하고 만월궁은 약사여래가 주재하는 동방정유리국의 궁전을 가리킨다. 이들 편액은 닫집이 불국정토를 상징하는 장식물임을 알려준다.
▲극락조가 적멸궁 앞 허공을 날고 있다.안병기
참고로 '닫'이란 '따로'의 옛말이며 닫집이란 집안에 '따로 지어놓은 또 하나의 집'이란 뜻이다. 쌍계사 대웅전 닫집 주변 허공에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3마리 극락조가 날고 있어 마치 환상의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한편 우물 정자 형태로 분할한 천장은 연꽃을 비롯한 다채로운 꽃으로 장식해 놓았다. 마치 허공에 떠있는 듯한 천장에 그려진 수많은 꽃들은 부처님이 설법할 때 하늘이 감동하여 공양한 꽃비를 상징한다.
▲봉황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안병기
대웅전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뒤로 한 채 마당으로 나와 봉황루로 다가간다. 이 봉황루는 범종루나 범종각도 아닌 사물 중 법고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는 정체불명의 건축이다. 혹 작은 강당인지도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법고는 잘 건조된 나무로 만든다. 특히 양면에는 음양의 조화가 깃든 소리를 얻기 위하여 장구를 만들 때처럼 법고의 한쪽 면에는 암소 가죽을, 다른 쪽 면에는 수소의 가죽을 댄다. 이렇게 만든 법고는 짐승을 비롯한 땅에 사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두드린다. 쌍계사 법고는 직경이 무려 182cm나 되는 크나큰 법고다.
▲봉황루 창방의 귀면안병기
이 봉황루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처마 밑 창방에 조각된 귀면 문양이다. 귀면은 우리 민속 속에 살아 있는 도깨비 형상이다. 귀면문의 원형이라는 중국의 도철이 괴기스럽고 공포감을 자아내는 무서운 형상이라면 우리 나라 귀면은 인간적이고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귀면은 지붕 기와나 다리, 창호 등에 새겨져 벽사와 수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나 이와 같이 누각의 창방에 귀면이 그려진 경우는 매우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봉황루를 돌아나오는 순간 불현듯 음미(吟味)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쩌면 느리게 산다는 것, 한가하게 산다는 것은 여운을 음미하기 위함일 것이다.
뎅그렁, 뎅그렁 울리는 풍경 소리가 던져주는 여운, 쏴아, 쏴 가단조의 바람 소리가 떨어뜨리고 간 슬픔의 긴 여운. 내가 산사를 찾는 것은 바로 그런 느낌들을 음미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가 느림을 삶의 한 덕목으로 삼는 것은 바로 삶에 숨긴 여운들을 음미하기 위함이 아닐까.
불명산 쌍계사의 산문을 나섰다. 보폭을 아주 좁게, 될수록 느리게. 마치 사탕을 아껴먹는 어린 아이처럼 쌍계사라는 절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경내를 빠져 나왔다.
오랫만에 마음이 한가로웠다. 한가하게 산다는 것은 게으르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여운을 느끼며 산다는 것이다.
| | 논산 쌍계사 가는 길 | | | |
| | | ▲ 성삼문 묘 | | 연무대 IC에서 우회전 해서 643호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왕주로 유명한 가야곡면 육곡리가 나오고 고개를 넘어서면 왼쪽에 성삼문 묘가 있다. 거기서 양촌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쌍계사라는 이정표가 보이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길이 끝나는 곳에 중산리 쌍계사가 나온다.
논산에서 중산리까지 시내버스 5회 운행되는데 25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쌍계사를 다녀온 후 논산시 부적면 충곡서원이나 은진면 관촉사, 대둔산을 들러도 좋다. / 안병기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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