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63

쫓고 쫓기는 자

등록 2004.06.10 09:09수정 2004.06.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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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팔득의 말에도 불구하고 백위길은 냉큼 청을 할 수는 없다고 여기며 먼저 말할 것을 독촉했다.

"이 사람!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누구인가! 어서 말을 해보게나."


"아니옵니다. 위아래가 있사온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청을 거두겠다는 투는 아닌지라 백위길은 더욱 박팔득을 몰아붙였고 그제야 박팔득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일을 얘기했다.

"소인에게 성격이 괄괄하고 힘께나 쓰는 동생 놈이 있사온데... 그 놈이 오래 전 어떤 어물전 상인에게 큰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한 사람을 해치워 달라는 청을 받아들였던 모양이옵니다."

백위길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어찌 남의 청으로 사람을 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마구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렇다면 형으로서 마땅히 설득해 거둘 수 있지 않나?"


박팔득은 거의 울먹이다 시피하며 말했다.

"...이복 동생인지라 제 말을 듣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포교님께서 그 자리에 납신다면 닥쳐올 불행한 일을 쉬이 막고 동생을 타일러 고이 보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이는 불의(不義)를 무릅쓰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오니 부디 포교님께서는 청을 들어 주시옵소서."


백위길로서는 거부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먼저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인데 무시할 수는 없었으며 매일 기찰을 돌고 있는 곳인 시전의 누군가가 이런 일을 부탁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포교로서 두고 볼 수가 없네! 자네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그 자와 만나기 위해 오늘 해시(亥時)경에 수표교 아래에서 기다린다고 들었사옵니다. 동생의 성정을 아는지라 함부로 나설 수 없사오니 포교님이 좋게 해결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포교님, 이제 제가 들어 줄 청을 말씀해 주십시오."

백위길은 여전히 마음 속으로 갈등이 생겼지만 다소 부담을 덜어내며 백 냥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야 어렵지 않사옵니다. 여기서 드리겠사옵니다."

박팔득은 언제 갚아달라거나 차용증을 써 달라는 말도 없이 백 냥을 셈하여 건네 주었다.

그 날 해시 경, 혼자 나온 백위길은 소매 속에 넣은 도리깨를 단단히 움켜잡은 채 수표교 근처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시(亥時)를 넘어서 통금을 알리는 인경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때쯤 일련의 사내들이 수표교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놈들이구나!'

백위길은 몸을 숨기며 사내들을 주시했다. 대충 보아 사내들은 네다섯쯤 되어 보였는데 선두에 오는 등에 큰칼을 진 사내가 유독 눈에 뜨였다.

'이거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일까?'

백위길은 왠지 불안했지만 이제 와서 약조한 바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뛰어들기에 큰칼을 진 사내의 살기가 백위길이 감당하기에 엄청났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맞은 편에서 한 사내가 조용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혼자 왔나?"

큰칼을 진 사내가 대뜸 칼을 뽑아들며 중얼거리자 맞은 편의 사내는 우뚝 멈춰 서며 대답했다.

"그래, 결국 사람을 샀군? 돈 몇 푼에 양심을 파는 네놈은 대체 누구냐?"

"곧 죽을 놈이 그런 건 물어서 뭐하겠느냐!"

큰칼을 지닌 사내, 바로 박팔득의 동생은 긴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칼을 곧추 세우며 맞은 편의 사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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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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