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자 조선일보에 몇가지 이유에서 아주 흥미로운 칼럼이 하나 실렸다. '한국형 진보'라는 제목의 ‘만물상’이 그것인데, 젊은 시절 공산주의 혹은 주체사상에 매료됐다가 과거를 반성하고 있는 세계의 지식인들을 소개하고 최근 한국의 진보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다룬 내용이다.
[관련기사] 조선일보 만물상 '한국형 진보'
이 칼럼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식인들 중엔 오가와 하루히사 도쿄대 교수도 있고, 저 유명한 앙드레 지드도 있다. 특히 명문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20대의 사회학도인 에이던 포스터카터는 김일성 팬으로 자처할만큼 열렬한 주체사상 신봉자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돌아서 차도 한국차만 고집할 정도로 한국 팬이 됐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현재 영국 리즈대학의 명예교수인 포스터카터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한국의 진보세력을 걱정한다. 포스터카터 교수에 의하면 한국의 진보는 미래를 위해 할일이 태산인데 60년 전의 친일문제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으며,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보수신문을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또, 노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서구지도자들이 갖는 위엄, 진지함, 신중성의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친일 청산은 잘못 끼워진 첫단추를 바로 잡자는 것
과연 그런가. 최근의 친일 청산을 위한 움직임이 과연 맹목적 과거지향인가. 감히 말하건대 친일 청산은 잘못 끼운 첫단추를 바로 잡자는 움직임이다.
약간의 비유가 허락된다면, 피할 수 없는 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옛날에 입던 옷을 버리고 새옷을 입으려던 때, 첫단추를 잘못 끼운 바람에 지금 꼴이 영 우습게 됐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선후기 팔도에서 소리없이 일어났던 민중의 자각과 건강한 개혁의 움직임이 일제의 침략으로 좌절됐고, 일제 치하에서 다시 불붙었던 자력독립에의 거센 움직임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어찌됐든 독립 후, 지난 역사의 과오를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으니 바로 친일 청산이었다. 그러나 기필코 이뤄냈어야 할 친일청산의 과제 역시 흐지부지돼 지금까지 왔다.
그때 이미 단추는 잘못 채워졌던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단추를 풀어 다시 올바르게 채우자는 것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친일 청산의 움직임일텐데 이것이 어찌 맹목적인 과거지향일 수 있을까.
조선일보의 과거 친일행적에 대해서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을텐데, 그런 조선일보가 감히 친일 청산에 대해 이토록 위험한 주장을 펴고 있으니 조선일보의 이같은 대담함이 이 칼럼이 흥미로운 첫번째 이유다.
'대단한' 조선일보의 엄살
한국의 진보세력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보수신문을 윽박지르고 있다고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윽박지른다면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이 말은 동등한 입장에 서 있는 양자의 의견대립에 대해서는 통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과연 그런가.
과거 반세기 넘도록 쌓아온 기득권을 지키려는 확고한 신념 아래 일관되게 펴고 있는 보수신문들의 생각과 그 생각이 대다수 돈 없고 빽없는 사람들의 행복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과연 지금의 한국사회가 평등한 사회인가. 서로 다른 의견이 건전하고 발전적으로 서로의 주장을 펼 수 있는 그런 사회인가. ‘윽박지른다’는 표현은 마치 약자인 보수신문들이 강자인 진보세력의 힘에 눌려 꼼짝달싹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단한' 조선일보의 이같은 엄살이 이 칼럼이 흥미로운 두 번째 이유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억지일 뿐
마지막으로 조선일보는 노대통령이 성공하려면 서구 지도자들이 신봉하는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는 포스터카터 교수의 말을 통해, 노대통령, 그리고 한국의 진보세력에 대한 진지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또 물어보자. 서구사회에서의 위엄, 진지함, 신중성의 가치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은 서구사회에서 가진 자들의 의무를 의미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참 좋으니 한국의 가진 자들도 그렇게 하라는 말과 같이 들린다. 그런데 한국의 가진 자들이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과거 중세 봉건사회는 물론이요 일제치하는 말할 것도 없이 정경유착으로 점철된 군사독재 시절의 성장위주 정책 아래 대다수 없는 자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일궈낸 지금의 경제 성장이 그들이 가진 부의 원천이고, 가진 자들이 오랜 세월동안 세습해온 부의 실체가 아닌가. 그리고 그 가진 자들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해온 언론이 누구였던가.
서구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상식이 돼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아니다. 오늘날 그들과 우리의 모습을 만든 과거의 역사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서구 지도자들의 위엄, 진지함, 신중함의 가치가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진정으로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면 노대통령이 서구 지도자들이 가진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고 충고하기 전에 한국사회에서 그같은 가치들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지를 먼저 제시했어야 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그것을 못하고 있다면 그 점을 꼬집어야 할 것이다. 억지 부리듯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서구의 잣대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아무데도 쓰일 곳이 없다. 이같은 조선일보의 억지가 이 칼럼이 흥미로운 세 번째 이유다.
조선일보의 역사와 전통?
포스터카터 교수처럼 한국을 아끼고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서구의 지식인들은 참 고맙다. 그들은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국의 문제들을 보고, 분석하며, 다양한 의견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의견과 충고일 뿐이다. 그들의 견해를 무시하는 태도도 옳지 않으며 그대로 믿고 따르려는 태도 역시 옳지 않다.
그보다 더 옳지 않은 것은 그들의 입을 빌어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히 전파하려는 일부 보수언론들이다. 포스터카터 교수와 같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이 땅의 진보에 대해 한마디 하는 것은 의견으로 받아들일만 하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그의 입을 빌어 이 땅의 진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조선일보의 '역사'와 '전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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