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역사는 흐를 만큼만 흐르는가

한홍구의 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史> 02를 읽고 나서

등록 2004.06.13 14:48수정 2004.06.13 16:38
0
원고료로 응원
언젠가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에게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후학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여쭌 적이 있었다.

그는 매우 소략하게 "역사는 흐를 만큼만 흐른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짧은 말에 담겨진 격동치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결국 역사에는 지름길도 장애물을 피하여 에둘러 돌아가는 길도 없다는 것이다.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 史> 02는 '단군에서 김두한까지'의 제1권에 이어 1937년 연안에서 님 웨일스가 만난 조선 혁명가 김산의 이야기부터 박정희가 주도한 월남파병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 교수가 밝히고 있듯이 이 서책은 "대한민국의 주류를 형성해온 사람들이 지워버리려 애쓴 기억들을 되살리는 날이 선 글들"을 (8쪽) 고집스레 담아내고 있다.

제1부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에서 필자는 '만보산 사건'에 뿌리를 두고 발생한 1931년 7월의 반(反) 중국인 폭동을 시작으로 우리의 부끄러운 인종주의를 단적으로 지적한다.

한민족의 순진한 동포애와 방향을 잘못 찾은 민족주의가 일제에 이용당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결론지으면서 그는 미군이 자행한 '노근리 학살'을 월남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양민학살과 한 줄에 세워 통렬하게 비판한다.

"베트남과 노근리. 한 곳에서 우리는 가해자였고, 다른 한 곳에서 우리는 피해자였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것 같지만, 사실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사건입니다. 동맹군이라는 이름의 군대가 주둔국의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눈 것이야 다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우리의 노근리는 베트남 중부지방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47쪽)


이 대목에서 나는 21세기 베트남전 양상을 닮아 가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어떻게든 그곳에 참전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대한민국 참여정부의 되풀이되는 오류의 우울한 그림자를 본다.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 배운다"는 나의 우울하고 쓸쓸한 명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제2부 '박정희, 양지를 향한 끝없는 변신'에서 우리는 오늘날까지 '영남 패권주의'와 더불어 너무도 당당하고 너무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박정희 담론의 깊은 뿌리를 만날 수 있다.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만큼 변신을 자주 행한 인간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하면서 한 교수는 변신의 구체적인 내역을 밝힌다.

"젊은 시절 박정희의 삶에는 네 번의 결정적인 변신이 있었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직후 광복군에 가담한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담한 것, 마지막으로는 여순 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 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하여 살아남은 것이다." (65쪽)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에는 꼴찌를 다투던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한 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그 후 박정희는 일본인 졸업자와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 만주인 동기생들과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하여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한다. "큰 칼 차고 싶어" 교사자리를 때려치운 그는 마침내 그토록 열망하던 일본군 소위로 부임한다.

대통령이 된 다음 박정희는 일본 군국주의 모델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고, 헐값으로 젊은이들을 미국의 용병으로 팔아 넘긴다. 그에 따르면 "한국군 소장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월급이 354달러인 반면, 필리핀군과 타이군 소위는 각각 442달러와 389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5천여 명의 죽음, 1만 명의 부상자, 2만여 명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가 양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의 대가로 한국은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제3부 '김일성이 가짜라고?'에서 필자는 우리의 현대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던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가 김산을 대면한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던 김산은 서른 셋의 꽃다운 나이에 절명한다. 역사학자이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자랑하는 한 교수는 김산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명문을 남긴다.

"여러 나라의 민족과 계급을 지도하는 소련을 어머니처럼 사랑했고, 중국인의 삶과 운명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혁명을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사랑했으며, 어리고 불확실한 어린아이와도 같은 조선혁명을 사랑하던 국제주의자 김산... 중국에 있는 조선혁명가 가운데 죽을 곳을 받아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던 김산은 그 자신이 마지막 아이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124-136쪽)


1980년대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과 함께 대한민국의 젊은 지식인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우리 역사학계는 이제라도 그의 온전한 이력을 되찾아 자리매김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스산한 살풍경으로부터 풀려나면 좋겠다. 윤동주와 이육사와 이상화가 일제 하 식민통치 시절 우리의 고단한 영혼과 육신을 노래했던 것처럼, 만주에서는 무장 독립군과 유격대원들이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 조국과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던 것이다.

제4부 '군대의 역사, 병역기피의 역사'에서 우리는 요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문제'와 학살자 전두환의 폭력정권시절 김두황으로 대표되는 '녹화사업'의 전모, 300만의 예비군과 500만의 민방위를 보유하고 있는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현주소 등을 만난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된 글에서 한 교수의 지적은 폐부를 찌르듯 날카롭기 그지없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40여개 국이지만, 우리나라처럼 가혹하게, 우리나라처럼 철저하게, 우리나라처럼 많은 인원을 처벌하는 나라는 없다. 전 세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양심수는 200-300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1,600명이다." (220쪽)


제5부와 6부에서는 사학비리와 지식인의 자기반성, 족벌신문 조선일보의 후안무치한 행각, 세대교체문제, 테러문제, 만원이 된 서울 등과 같은 우리시대의 첨예한 문제들이 망라되어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가 바라보는 대한민국 현대사는 너무도 음산하고 구슬프며 우리의 가슴을 저민다. 그러기에 이 서책의 독자들은 영화 <오아시스>의 관객처럼 몹시 불편하다.

<대한민국 史>는 유쾌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어린것들과 그 어린것들의 후예들이 보다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런 부류의 서책들을 대면할 수 있도록 오늘의 우리는 이야기 속의 소년처럼 용감하게 이 서책을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사 세트 - 전4권

한홍구 지음,
한겨레출판, 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영화와 세상, 책과 문학, 일상과 관련한 글을 대략 3,000편 넘게 올려놓고 있으며, 앞으로도 글쓰기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3. 3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4. 4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