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펜, 수채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박물관 건립 위원회가 마련한 이번 전시회는 헤세가 이주해 살았던 몬타뇰라 근교의 자연 풍경을 그린 수채화들이었다.
나치와 같은 인간들에게 신물나고 혐오증을 느낀 때문이었을까.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무와 구름, 꽃, 호수 등 녹색과 푸른색이 가득한 풍경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전시 작품 중 <정원사 헤세>가 유일하게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일 정도이다.
나치에 찍혀 스위스 몬타뇰라로 이주해서 은둔 생활을 하던 헤세의 집 대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실례지만 방문할 수 없습니다."
'알'의 파괴를 역설했던 그 역시 알 밖으로 나오는 일은 두려움이었던 모양이다. 이 위대한 작가에게도 역시 세계라는 '알'은 파괴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일생에는 여행에 대한 기록이 꽤나 많이 나온다. 그러니까 여행도 "꿩 대신 닭"의 변형인 것이다. 이 점이 내가 헤세에게서 느끼는 동류의식이다. 사실 사람의 삶이란 "도진 개진"이 아니던가. 특별한 삶이란 희귀하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삶이란 본디 구태의연함을 그 기본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세는 내게 묻는 듯 했다. 이젠 "너를 감싸고 있던 알을 깨트렸느냐"라고. 나는 여전히 그 알을 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리고 세계라는 알을 감싸고 있는 단백질의 두꺼움에 차츰 지쳐가고 있는 중이라고 실토했다.
헤세는 알을 깨지 못하는 새는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없지만 알 속에 갇혀 사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라고 내 등을 또닥또닥하며 위로했다.
"꿩 대신 닭이다." 내 생애를 망친 것은 이 말이었다. 삶에 대한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난 서둘러 그 말 속으로 도피하곤 했었다. 꿩은 꿩이고 닭은 닭이다. 그러나 닭에다 꿩의 터럭을 붙인다해서 꿩이 될 리 없건만, 닭에다 억지로 꿩의 터럭을 붙이며 살아온 날들이 무릇 기하였던가. 그렇게 자기 합리화에 맛들이고 그때마다 불면으로 몸을 뒤채고 잠꼬대를 하며 나는 차츰 삶에 이력을 붙여왔다.
헤르만 헤세가 펼쳐놓은 삶에 대한 생태학들을 되새기는 시간은 기쁨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상이라는 알의 안온함을 차마 팽개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의 아트만을 들여다보는 동안 어느 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아니, 땅에 깔리던 건 끝없는 도로(徒勞)를 반복한 내 일생에 대한 깊고 짙은 회한이었던가.
▲도보여행을 떠나는 헤세
도보여행을 떠나는 헤세를 뒤쫓아 남이섬을 떠났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는' 선착장에서 그와 헤어졌다.
가늘고 흰
부드럽고 조용한 구름이
하늘에 흘러간다
그대의 시선을 수그려
희고 시원한 구름이
푸른 꿈 속을 지나가는 것을….
헤세는 그날 하루 내 꿈 속을 지나간 구름이었다. 이제 나는 그 구름이 지나간 자리를 생각한다. 그 구름이 마음의 하늘 어느 편으로 흘러갔던가. 왼쪽이었던가, 오른쪽이었던가.
| | 헤르만 헤세 연보 | | | |
| | ▲ 자화상(1919) | ⓒ헤르만 헤세 | | 1877년 독일 뷔르템베르크 출생
1890년 괴팅엔의 라틴어 학교 입학
1891년 마울브론 신학교 입학
1892년 작가가 되기 위해 신학교 자퇴
1902년 어머니에게 헌정한 <시집 Gedichte> 발표
1905년 <수레바퀴 밑에서> 출간
1910년 장편 <게르트루트 Gertrud> 발표.
1911년 화가 한스 쉬틀제네거와 함께 인도 여행
1913년 동방여행기 <인도에서 Aus Indien> 출간.
1914년 장편소설 <로스할데 Ro halde> 출간
1919년 에밀 싱크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 발표
1922년 "인도의 시"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 <싯다르타 Siddhartha> 발표.
1927년 장편소설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 발표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나치의 탄압으로 작품들이 몰수되고 출판 금지됨
1943년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를 2권으로 취리히에서 출간.
1957년 <헤세 전집 Gesammelte Schriften>이 7권으로 증보 출간됨.
1962년 몬타뇰라의 뇌출혈로 사망
/ 안병기 | | |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