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리가 누구야? 혹시 자네 아냐?"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67> 공장일기<39>

등록 2004.06.17 13:56수정 2004.06.1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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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소리'란 필명을 쓸 당시 함께 활동했던 남천문학동인들과 시인 이선관(앞줄 오른쪽 두 번째), 지금 의식불명상태로 누워 있는 최명학 시인(앞줄 왼쪽 두 번째), 그리고 나(뒷줄 오른쪽 첫 번째)

'이소리'란 필명을 쓸 당시 함께 활동했던 남천문학동인들과 시인 이선관(앞줄 오른쪽 두 번째), 지금 의식불명상태로 누워 있는 최명학 시인(앞줄 왼쪽 두 번째), 그리고 나(뒷줄 오른쪽 첫 번째) ⓒ 이종찬

운다
검지손가락 한 마디 잘린 그 가시나
눈때 묻은 공장 철망 쥐어 뜯으며
속으로 속으로 바알간 피울음 삼킨다


조장님 반장님 계장님
앞으로 정말 안전사고 안 낼게요
저도 남들처럼 일할 수 있어요
제발 나가란 소리만 하지 말아주세요
저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울며불며 부서장 꽁무니 졸졸 따라다녔지만
시시비비도 가리기 전에
잘린 손가락 채 아물기도 전에
공장 철망 밖으로 쫓겨난 그 가시나

이제 굶어 죽는다
이제 시집 못 간다
이제 신세 조졌다
닭장 같은 공장 철망 기어오르며
갸녀린 앞가슴 풀어 헤친다
피멍 든 입술 깨물며 히죽히죽 웃는다

(이소리 '나팔꽃' 모두)


사출실로 부서를 옮긴 뒤부터 나는 하루 내내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예전처럼 일일생산량 때문에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리며 아둥바둥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일주일에 두어 번 있는 시험 생산을 하는 날을 빼고는 늘 나 혼자뿐이어서 사출기를 공회전시켜 놓은 뒤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7년째 공장에 다니면서 스스로 경험하고 느낀 수많은 이야기들과 내 주변 동료들의 팍팍한 삶을 마치 일기를 쓰듯이 적어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창작한 시들을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다가 걸리는 곳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고쳤다.

하지만 시를 발표할 지면이 거의 없었다. 순수문학 쪽에서는 <현대문학>과 <시문학> 등 여러 잡지가 매월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그곳에는 아예 시를 보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잡지에서 내가 쓴 노동시, 그러니까 사상이 삐딱한 그런 시를 실어 줄 리도 없었고, 그곳은 내가 가고자 하는 시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1980년 언론통폐합 때 폐간을 당한 <창작과비평사>는 출판사 이름을 <창작사>로 바꿔 '00인 신작시집' 이란 이름의 무크지를 가끔 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이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는 <실천문학>이란 무크지와 샘터 크기의 얄팍한 기관지를 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런 잡지에 시를 발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크지들은 <마산문화>처럼 부정기 간행물이어서 언제 나올지도 잘 몰랐다. 그리고 언제 폐간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였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너무나 멀고도 길던 나의 병역특례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그런 때였다.


"요즈음 시가 참 좋아졌어. 그래, 시는 바로 이렇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생활 현장을 써야 하는 거야."
"비행기 고마 태우이소. 그라다가 땅에 떨어져 처박히모 우짤라꼬예."
"열심히 써.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 시들은 병역특례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발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말년에 특히 조심해야지."


그랬다. 1984년 당시 나는 병역특례기간을 불과 1년 남짓 남겨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해를 보내고 이듬해 1985년 12월까지만 근무를 하면 나는 마침내 병역특례라는 올가미에서 훌훌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대부분 병역특례자들은 말과 행동을 몹시 조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부분 병역특례자들은 그동안 같은 공장에서 7~8년 동안 꼼짝 없이 다니면서 여러 불이익을 참 많이 당했지만 그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기나긴 세월을 견딘 끝에 마침내 맞이하는 자유를 결코 놓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 혹여 실수라도 하여 해고라도 당하게 되면 곧바로 징집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때 재수 나쁘게 징집이라도 되면 정말 큰 일이었다. 그동안 병역특례기간을 채우기 위해 찍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뼈가 바스라지도록 일해온 세월도 몹시 안타깝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십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가 더 문제였다. 만약 그때 다시 군에 가게 된다면 무려 10여 년이란 세월을 군복무에 바쳐야 하는 셈이었다.

나 또한 그걸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아예 내가 시를 써서 모으고 있는 노동시첩에도 필명을 썼다. 공작부 황복현 과장의 말마따나 행여 내가 쓴 노동시를 누군가 보더라도 이건 내가 쓴 시가 아니라는 그런 발뺌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안전장치를 미리 마련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이름은 모두 세 가지가 되었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종찬'이라는 내 본명과 <마산문화>팀에서 부르는 '민노'(民勞) 그리고 동인지나 잡지 등에 시를 발표할 때마다 쓰는 '소리'란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공장에서는 내 이름을 '이종찬'으로, <마산문화>팀에서는 '이민노'로 불렀고, 글동네에서는 '이소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랬다. 필명은 참으로 편리했다. 가끔 잡지에 실린 내 시를 주변 동료들과 함께 읽을 때도 나는 남의 시를 읽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처음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을 때 뭔가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쓴 시를 다른 사람이 쓴 시처럼 읽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내 시의 장단점을 볼 수 있는 객관적인 눈이 뜨여 좋았다. 게다가 공장간부들에게 괜한 의심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이소리가 누구야? 혹시 자네 아냐?"
"아니, 제가 이렇게 시를 못 쓴단 말입니꺼?"
"냄새가 나는데?"
"아, 아입니더. 제가 머슨(무슨) 재주로 이런 진보적인 잡지에 시를 발표할 수가 있겠습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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