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말하는 화가 최영진

소리 없는 외침, 화폭에 담아…

등록 2004.06.19 09:09수정 2004.06.2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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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묵운 최영진

묵운 최영진

육신의 귀가 들리지 않아 마냥 먹먹한 세월을 살아가야만 하는 청각장애인에게 소리는 무엇일까?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 청각장애인들도 소리를 느낄 수는 있습니다. 흔들리는 여인의 옷자락에서 바람 소리를 느끼고, 영롱하게 빛나는 아침 이슬 방울에서 햇살의 속삼임을 듣고, 풀벌레가 기어가는 나무 잎새에서 생명의 힘찬 함성을 듣습니다."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들도 다다르기 쉽지 않은 예술의 세계에 도전, 그림으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경남 양산의 청각장애인 화가, 묵운(黙雲) 최영진(66) 화백의 말이다.

지난해 11월 6일 재단법인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가 연 '제13회 대한민국장애인 미술대전'에서 받은 입선 상장을 보여 주며 활짝 웃는 최 화백의 얼굴은 티 없이 맑다. 수상 작품은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산'

운보 김기창을 꿈꾸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산' 그래, 그것은 어쩌면 최 화백이 끝없이 추구해 온 삶의 지향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섯 살 때 장티푸스를 앓아 청력을 잃은 그는 답답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린 시절 어느 날 문득 그림붓에 손을 댄다. 그때가 열두 살 때.

남다른 손재주를 지닌 데다 세상의 온갖 소리를 육신의 귀가 아닌 영혼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심미안(審美眼)을 지닌 그에게 그림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곧잘 무너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 더 없이 좋은 방편이었던 것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과 같은 화가를 꿈꾸었습니다."

운보 역시 청각장애를 딛고 한 시대의 걸출한 화가로 우뚝 섰다는 점이 소년 '영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리라. 그래서 그랬을까? 그의 화풍은 운보의 것을 빼닮았다. 그가 즐겨 그리는 한국화, 문인화에는 육신의 모든 아픔을 이겨내고 한국미술사의 큰 획을 그은 운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구름 한 조각이나 길섶의 풀 한포기도 모두 스승

경주 태생인 최 화백이 양산 사람이 된 것은 지난 86년. 상북면 내석리에서 시작한 양산살이가 오늘의 북정동 보금자리로 이어지기까지 하마 18년. 이제 양산사람이 다 된 최 화백은 북정동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하루 다섯 시간 넘게 창작에 몰두하며 이녁의 뜨거운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미소를 잃지 않고 희망을 간직한 채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행ㆍ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6월 양산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여덟 번째 개인전을 가지면서 시민들에게 띄운 그의 인사말이다. 이 땅의 장애인들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에게도 학교의 문턱은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대구대학교 부설 대구영화학교 졸업과 불국사 부설 불교대학 미술교육대 수료가 그의 학력의 전부.

그러나 그런 그에게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한 조각이나 길섶의 풀 한포기도 모두 가르침을 주고 배움의 눈을 뜨게 하는 스승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스승들. 찰리 채플린, 베토벤, 로트랙, 루즈벨트, 미셸 페투루치아니, 올란드, 세파다, 그리고 운보 김기창… 이들은 모두 장애를 딛고 일어서 성공을 이뤘다는 점에서 최 화백이 본받고 따르고 싶은 스승들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하고 신념과 확신으로 나랏일을 보셨습니다. 확신이 서있는 얼굴에는 자신감과 생기가 넘친다고 했습니다."

a 작품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산'

작품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산'

아산 조방원 선생과 허만욱 선생을 사사하면서 어엿한 화가로 발돋움한 그는 88년부터 올해까지 여덟 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90년 대한민국 장애인 작가 12인전을 비롯해 한국장애인작가 회원전, 청미회 회원전, LA초대전, 삽량문화재에 출품하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예술의 불꽃을 지펴나가고 있다.

국제종합미술대전 특별상(1988년), 대한민국 장애인미술대전 특선(2000년), 호남전국미술대전 입선(2001년), 정수미술대전 입선(2001년), 그리고 지난 11월 대한민국 장애인미술대전 입선 등 수상 경력도 만만찮다.

93년에 법무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의 작품이 경남도청 문화예술과와 전남대학교, 부산지방검찰청 지청장실, 양산시청 등에 소장되어 있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국회 정몽준 의원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현재 한국미협 회원, 청미회 회원, 전국장애인작가협회 운영위원 이사, 최씨 경주 대종친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그의 예술 세계가 앞으로 더욱 크게 넓게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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