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만에 되찾은 훈장

<아버지의 6·25 경험담> 네 번째 이야기

등록 2004.06.21 10:08수정 2004.06.2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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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6·25전쟁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아버지를 1인칭으로 정리했습니다.<필자 주>


a 병적 확인 공문

병적 확인 공문 ⓒ 박연규

1950년 12월. 우리는 계속 올라갔다. 아군은 커다란 전투 없이 거의 걸어서 올라가다시피 했다. 웅산군, 퇴천군까지 올라갔다. 전쟁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중공군으로 인해 후퇴 하기 전까지….

접전 지역 나는 중공군 한 명과 마주친다.

"손 들어!"

그러자 나에게 총을 겨누려는 행동을 취하려다 상황을 파악했는지, 손을 들었다.

"라이, 라이"


내가 아는 유일한 중국말이다. 나도 잔뜩 긴장했지만 순순히 내 말을 따른다. 중공군을 데리고 와서 중대에 넘겼다. 저 중공군은 어떻게 될까? 아마 포로수용소로 넘겨지겠지. 인민군의 포로가 되면 거의 죽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지금 분대장은 머리가 유난히 짧다. 내가 이 부대로 배치 받은지 얼마 안 되는지라 다른 분대원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분대장은 이중포로였다.


원래 분대장은 국군이었다. 그러던 중 인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민군이 되었다. 그래서 인민군이 되어 전투를 하던 중에 다시 국군에게 잡혀 포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짧았던 것이다. 대부분 국군은 머리가 길었고, 인민군은 머리가 짧았다.

그런 사람이 다시 국군이 되어 분대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분대장이 받았을 고초는 컸겠지만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이런 이중포로를 한 명 더 만났다.

a 병적 정정 및 훈장 수여사실 확인 공문

병적 정정 및 훈장 수여사실 확인 공문 ⓒ 박연규

1951년 6월.

중대장으로부터 중공군을 생포한 공으로 훈장을 받았다. 그 다음날 부분대장이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집에 다녀오려고 하니 훈장을 빌려달라"

나는 고참이고 해서 별 생각 없이 빌려주었다(고향부근을 지나게 되면 잠깐씩 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고참은 집에 다녀온 후에도 훈장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도 돌려달라고 하기 뭐해서 그냥 그렇게 지냈다(아버지가 다시 이 훈장을 돌려받기까지 무려 5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9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마침 "잃어버린 훈장을 찾아 드립니다"라는 뉴스가 나왔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계시다가 "나도 훈장 받은 거 있는데…." 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외손자 광식이는 국방부 사이트에 아버지의 사연을 문의했다. 처음에는 기록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분명 6·25전쟁에 참전하셨는데 이게 웬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호적에 올라간 이름, 아버지는 박봉득(집에서 부르던 이름)이란 이름으로 군에 기록을 남겼다. 호적상의 이름(박동식)으로 조회를 했으니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a 훈장증

훈장증 ⓒ 박연규

군번 역시 오류가 있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군번은 '9500739' 이다. 하지만 군 기록에 남아있는 군번은 '9507219' 이었다. 아버지가 군번을 부여 받을 때 1000번대 군번은 없었다고 기억하신다. 그리고 750번 군번까지 1사단으로 배치되었다는 것도 기억하신다. 그런데도 기록에 7000번대의 군번이 남아있는 이유는 아마 기록하는 이의 착오였던 것 같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전에는 한문으로 내려쓰기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3(三)을 나누어 2와 1로 본 것이다. 그래서 '739'가 '7219'가 된 것이다.

이름과 군번에 이렇듯 오류가 있었기에 이것을 바로 잡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름을 바로잡으려면 지역거주자 2명의 보증과 면장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아버지는 2002년 12월에 훈장과 훈장증을 되찾았다. 50여 년만에…. <계속>

a 화랑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 박연규

a 훈장

훈장 ⓒ 박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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