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처음 만난 ‘한 여름밤의 천막극장’

TV 한 대 없던 시골마을 초등학교로 온 순회 영화단

등록 2004.06.22 11:07수정 2004.06.22 14:5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폐교가 된 지 오래된 내가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화순북면동국민학교 운동장은 사람 출입이 없습니다.
폐교가 된 지 오래된 내가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화순북면동국민학교 운동장은 사람 출입이 없습니다.김규환
모내기가 다 끝난 방학 때였다. 1976년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벽지 빨치산 마을(전남 화순 810m 백아산 자락. 조정래의 <태백산맥> 7권 중반부 이후로는 백아산이 주 무대다. 전 3권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은 전남도당사령부가 있던 백아산을 무대로 하고 있다. 당시 화순북면동국민학교는 전교생이 210명 정도였다)에 희소식이 돌았다.


마을 이장과 새마을부녀회장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핵교에 영화패가 온다”는 소식은 마을을 들뜨게 했다. 영화가 뭔지, 활동사진이 뭔지 전혀 모르던 철없던 나도 여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나 영화가 뭐시댜?”
“몰러 나도 본 적이 없응께.”

답은 간단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누나에게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른들도 몰랐다. 방학 때라 광주 댁으로 가신 선생님께 여쭤 볼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TV 한 대도 없던 촌에서 영화를 상상하는 건 더 어렵다. 광주로 유학간 형들도 거의 없는 빈궁한 곳이니 해결사가 있을 리 없었다. 유랑극단 한 번 찾아오지 않은 마을에 영화라니!

남들처럼 몰래 쌀을 퍼다 파는 방법도 몰랐고, 용돈은 아예 받을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때다. 친구들 손잡고 광주까지 3시간 동안 걸어서 가는 방법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냥 꼴이나 베고 나무 하러 다니는 게 주된 일이었고 멱 감거나 삐비, 찔구, 오디, 버찌나 따먹는 아이들이 뭘 알겠는가. 중학교 때도 집을 떠난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리 마을 위 저수지에서 바라본 백아산-이 너머에 백아산 휴양림이 있습니다. 움푹 팩 바로 오른쪽이 그 유명한 마당바위입니다. 2000명 정도는 마당바위 위에서 놀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을 위 저수지에서 바라본 백아산-이 너머에 백아산 휴양림이 있습니다. 움푹 팩 바로 오른쪽이 그 유명한 마당바위입니다. 2000명 정도는 마당바위 위에서 놀 수 있습니다.김규환
해질 무렵 일찌감치 밥을 먹고 아이들끼리 먼저 학교로 달려갔다. 철퍼덕철퍼덕 신작로로 넘친 물도 아랑곳 하지 않고 뛰었다.


학교에 도착해보니 모자를 푹 눌러 쓴 아저씨 대여섯 명이 바삐 움직인다. 운동장 동쪽에 설치된 날이면 날마다 타고 올라 반대로 넘던 사다리 구조물 전체를 흰 천으로 덮어 묶고 있었다.

티켓을 따로 발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려면 몇 군데 나무말뚝을 박아 새끼줄을 쳐놓은 금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어슬렁거리다 끝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봤다.


“야 색끼들아. 니기덜 영화가 뭔지 알어?”
“아니. 글면 너는 알아?”
“째까만 있어봐 임마. 내가 금방 알아볼 텡께.”

화물차에 실린 발동기가 요란하게 적막한 시골 학교를 “통통통” 울렸다. 궁금증이 극에 달한 나는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를 골라 여쭤보기로 했다.

“아자씨!”
“뭣 땜시 그냐?”
“아녀라우….”

선생님과 달리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아저씨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차르르르” 풀무치가 찰칵거리듯 소리를 내며 필름이 서서히 풀어지며 반대편으로 감긴다. 시험 가동 중이었다. 몇몇 동네 꼬마 녀석들은 필름에서 그냥 빨간 불빛만 나오는 줄 알고 영사기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손으로 빛이 나오는 부분을 막아보기도 한다.

곧 으스름해지자 영사기 주위로 모기와 깔따구, 하루살이가 몰려들었다. 나와 동무들은 마냥 신기해 따끈한 영사기 불빛에 머리를 처박아 영화와 첫 대면을 했다. ‘그래, 내가 첫째로 불빛을 쬐었으니까 제일 먼저 영화 본 것이야’라고 생각하며 뿌듯해 하고 있었다. 돈가스(비프스테이크)를 시켜놓고 스프만 먹고 나온 시골 사람들 이야기처럼 말이다.

요란한 개구리 소리가 긴 밤으로 초대를 했다. 사람들은 각자 들고 온 가마니 쪼가리나 비료 부대를 깔고 앉았다. 삼삼오오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른들 손엔 들린 부채는 바람 한 점 없는 데 요긴할 뿐 아니라 모기를 잡는데도 쓸모가 있었다. 한 집에서 대여섯 명은 기본이고 예닐곱, 열이 넘는 집안도 있었다. 학교 절반이 넘는 꽤 큰 운동장에 그 많은 사람이 몰리기는 운동회 때 빼고 전에 없던 일이다.

어디에 설치한지를 모르는 스피커에 대고 “쎄쎄”, “쎄쎄” “아아 마이크 실험 중”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이어서 “퉁퉁” 소리가 나더니 흰 천에 불빛이 비친다. 한 사람은 화면크기를 맞추느라 진땀을 뺀다. 영화 화면은 처음부터 무척 큰 빛줄기가 연신 짝짝 빗금을 그어댔다.

소위 연애질(?)을 다룬 첫 편은 예정 시각보다 30여 분 늦게 시작되었다. 제목, 출연자, 배경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영화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키스를 해대는 통에 우린 눈을 돌릴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필름이 끊기고 화면이 죽기를 반복했으니 손가락 사이로 슬며시 훔쳐보는 일도 없었다.

중학생들만 “에~”하며 아쉬운 말을 내지른다. 그래도 3~4분여 지나면 불빛이 비추고 다시 돌았다. 그렇게 첫 편은 열 번 가량 멈췄다가 다시 돌았으니 아무 흥미도 주지 못한 채 끝났다. 기존 필름 통을 빼내고 다시 시작하는 데는 5분 여의 시간이 걸렸다. 항의할 줄도 모르고 공짜라니 그저 보고 있는 것이다.

학교 가는 길은 아직도 똑 같습니다. 이젠 농기계만 다니는 길입니다.
학교 가는 길은 아직도 똑 같습니다. 이젠 농기계만 다니는 길입니다.김규환
밤은 깊어갔다. 둘째 편은 우리 시골 마을보다 훨씬 넓은 평야지대 풍경이 펼쳐진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대강 이렇다.

소작을 붙여먹던 청년과 열아홉 살 처녀는 사랑하는 사이다. 지주쯤으로 보이는 할아비가 그만 아리따운 처자를 겁탈하기에 이른다. 처자는 낯부끄러워 청년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구르며 울음으로 며칠을 보낸다. 어른들로부터 집을 나가 죽든지 그 영감네 후처로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는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청년은 낫을 잘 들게 갈아서 지주 집으로 뛰었다. “요런! 고연 놈 여기가 어디라고?” “이씨-” 하며 낫을 쳐들었다.

그 때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들썩였다.

“죽여! 죽여! 저 씨버럴 놈은 죽여야 돼!”
“목을 철겨부러!”
“쩌런 놈은 창시를 꺼내부러야 한당께.”

순간 주인공은 지주 놈 목을 쳐버렸다. 핏방울이 시퍼런 낫에 묻어있었다. 섬뜩한 그 장면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네 마을 사람들은 12시가 다 되어 각자 집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돌아갔다.

“누나, 나 업어줘.”
“그냥 걸어가면 안 될까? 돌부리에 걸리면 넘어진당께.”
“실어 업어줘.”

나와 영화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여름 밤의 천막극장>은 <시네마천국>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큰댁 옆에 있던 느티나무는 6.25 때 대포를 맞아 죽었습니다.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큰댁 옆에 있던 느티나무는 6.25 때 대포를 맞아 죽었습니다.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 "우리 오빠" 후폭풍...이준석 추가 폭로, 국힘은 선택적 침묵 김건희 "우리 오빠" 후폭풍...이준석 추가 폭로, 국힘은 선택적 침묵
  2. 2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3. 3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4. 4 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5. 5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