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무공훈장, 반세기 만에 주인 품에

73번째 생일 선물로 화랑무공훈장 받은 문인식 할아버지

등록 2004.06.23 11:28수정 2004.06.2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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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사단장이 문인식옹에게 훈장를 달아 주고 있다.
53사단장이 문인식옹에게 훈장를 달아 주고 있다.조수일
"평생을 살면서 오늘처럼 감격적이고 뜻 깊은 날은 없었습니다. 이제껏 받아 본 생일 선물 가운데 가장 값지고 큰 선물입니다."

자신의 73회 생일을 맞아 6·25전쟁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운 공로로 후배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문인식(73·부산시 해운대구 반여2동) 할아버지.

이밖에 김문일(80·경남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방종수(1999년 작고)옹이 6·25전쟁이 발발한 지 54주년을 앞둔 23일 오전 10시 30분 육군 제53보병사단 연병장에서 장병과 보훈단체, 해운대 초등학생 등 15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반세기 만에 찾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회한을 달랬다.

그러나 1953년 8월에 화랑무공훈장 수훈자로 결정되었으나 끝내 훈장을 품어 보지 못하고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방종수 할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인 희종(47·부산시 해운대구 좌동)씨가 훈장을 받아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훈장을 받은 노병들이 후배 장병들로부터 경례를 받고 있다.
훈장을 받은 노병들이 후배 장병들로부터 경례를 받고 있다.조수일
군악대의 환영 주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사단장을 비롯한 장병들, 그리고 이날 안보현장 체험학습을 위해 부대를 찾은 해운대 초등학생들의 환영과 힘찬 박수 속에 가족과 함께 부대에 도착한 이들은 비록 반세기가 훨씬 지나 받은 훈장이지만 기백만큼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또한 2대의 열병차에 나눠 타고 장병들의 열병을 받을 때는 또렷한 목소리로 "충성"을 외치며 절도 있는 거수 경례로 답하며 노병의 당당함을 보여 줬다.

기념식을 마친 이들은 이어서 후배 장병들이 먹고, 입고, 쓰는 우리 군의 장비와 물자를 관람한 뒤 사단장을 비롯한 부대 관계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하루를 보냈다.

이날 훈장을 찾은 주인공 가운데 두 차례의 부상과 중공군에게 포위되는 고비를 넘기며 생사를 넘나들었다는 문인식(73)옹. 문옹은 서울 강서농림중학교 졸업반이던 당시 19살의 나이로 1950년 12월에 입대, 대구로 내려가 총기 조작 등 간단한 훈련만 받은 채 8일 만에 6사단 7연대 수색중대로 배속됐다.


문옹은 51년 1월 1일 동두천중학교에서 벌어진 첫 교전에서 수적 열세로 미아리까지 밀려난 뒤 다시 3일간 밤낮으로 행군을 한 끝에 강원도 횡성지구 전투에 참전하게 됐다. 그리고 51년 10월 강원도 평창의 백석산전투에서는 왼쪽 손에 총탄 2발이 관통하는 부상으로 3개월간 후송 치료 후 다시 강원도 철원의 백암산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뒤 몇 차례 전투를 더 치른 문옹은 두 번에 걸친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52년 4월경 경기도 용문산에서 매복 작전 중 중공군에게 위치가 노출돼 기관총 세례로 왼쪽 뺨을 스치는 관통상을 입었다. "조금만 얼굴 안쪽으로 총탄이 지나 갔더라면 전사했을 뻔했는데 천운을 타고 났다"고 말하는 문옹은 병원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연이은 전투에 참전했다. 그때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어 지금은 보청기나 부인의 도움 없이는 의사 소통을 못하는 등 전쟁의 상흔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두번째 고비는 52년 10월경 강원도 사창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중대원 전원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일이다. 나중에 살아 남아온 중대원이 1개 분대원 정도였다. 문옹은 "일생 중에서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고 지금도 같이 훈련 받던 전우들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며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후 스물두 살 되던 53년 10월 31일 간부후보생 6기로 임관, 58년에 중위로 전역하였다. 51년 8월 강원도 현리에서 중공군을 생포한 공로로 그해 12월 30일 금성화랑무공훈장 수여자로 결정돼 수여증만 받았으나 그마저도 잃어 버렸다.

그후 부인(이호순·69)이 육군본부 등에 어렵사리 확인 절차를 거친 끝에 최근에서야 훈장 수훈자라는 사실 확인과 함께 보훈청으로부터 국가유공자증을 받게 된 것이다. 문옹은 "뒤늦게나마 부대와 관계당국의 도움으로 큰 영광을 얻게 돼 무어라 감사의 말을 전해야 될지 모르겠다"며 "7월 초에 입대하는 외손자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제야 달게 된 무공훈장
이제야 달게 된 무공훈장조수일
창군 당시에는 상훈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6·25 전쟁이 계속되던 1950년 10월 18일이 되어서야 대통령령으로 법령이 제정되어 무공훈장은 수여되기 시작했다. 전쟁 기간 중에는 임시로 가수여증을 부여하고, 전쟁 후인 1955년 3월부터 12월까지 현역 우선으로 훈장증과 정장을 제작하여 수여했다. 그러나 전역과 주소 불명 등의 이유로 주인을 찾지 못한 훈장이 많았다.

육군에 따르면 지난 89년부터 '무공훈장 찾아 주기운동'을 역점 사업으로 선정, 관련기관과 함께 각종 신원 확인 방법을 통해 훈장찾아주기 운동을 해 왔다. 그 결과 현재까지 7만1725명에게 무공훈장을 교부했지만 아직도 9만여명이 넘는 참전용사에게 무공훈장이 교부되지 못한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와 함께 육군53사단도 육군본부, 보훈청과 함께 전산망을 활용하는 방법 등을 통해 부산과 울산, 양산 지역에서 지난 2002년과 2003년에는 각각 296명과 55명의 훈장 주인을 찾는 성과를 거뒀다.

그동안 사단 창설기념일을 비롯한 각종 부대 초청 행사와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이 직접 개별 방문하는 등 최상의 예우를 갖춰 훈장증을 전달해 왔고 이번 확인 과정을 통해서도 15명의 훈장 수훈 사실을 새로이 확인하여 훈장을 전달함으로써 노병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무공훈장을 받으면 관할 보훈청에 등록절차를 거쳐 국가유공자로 인정되며 65세 이상 생존수훈자들에게는 매월 무공명예수당 지급과 가구당 2인의 취업 보장, 생업 및 주택자금의 저리융자, 보훈병원 진료시 할인혜택, 사망시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

사단 관계자는 "앞으로도 가용한 방법과 모든 방안 등을 동원하여 유가족과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 무공수훈자와 호국영령들의 명예를 드높일 계획"이리며 "이들이 국가유공자 예우와 보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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