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을 받은 노병들이 후배 장병들로부터 경례를 받고 있다.조수일
군악대의 환영 주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사단장을 비롯한 장병들, 그리고 이날 안보현장 체험학습을 위해 부대를 찾은 해운대 초등학생들의 환영과 힘찬 박수 속에 가족과 함께 부대에 도착한 이들은 비록 반세기가 훨씬 지나 받은 훈장이지만 기백만큼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또한 2대의 열병차에 나눠 타고 장병들의 열병을 받을 때는 또렷한 목소리로 "충성"을 외치며 절도 있는 거수 경례로 답하며 노병의 당당함을 보여 줬다.
기념식을 마친 이들은 이어서 후배 장병들이 먹고, 입고, 쓰는 우리 군의 장비와 물자를 관람한 뒤 사단장을 비롯한 부대 관계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하루를 보냈다.
이날 훈장을 찾은 주인공 가운데 두 차례의 부상과 중공군에게 포위되는 고비를 넘기며 생사를 넘나들었다는 문인식(73)옹. 문옹은 서울 강서농림중학교 졸업반이던 당시 19살의 나이로 1950년 12월에 입대, 대구로 내려가 총기 조작 등 간단한 훈련만 받은 채 8일 만에 6사단 7연대 수색중대로 배속됐다.
문옹은 51년 1월 1일 동두천중학교에서 벌어진 첫 교전에서 수적 열세로 미아리까지 밀려난 뒤 다시 3일간 밤낮으로 행군을 한 끝에 강원도 횡성지구 전투에 참전하게 됐다. 그리고 51년 10월 강원도 평창의 백석산전투에서는 왼쪽 손에 총탄 2발이 관통하는 부상으로 3개월간 후송 치료 후 다시 강원도 철원의 백암산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뒤 몇 차례 전투를 더 치른 문옹은 두 번에 걸친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52년 4월경 경기도 용문산에서 매복 작전 중 중공군에게 위치가 노출돼 기관총 세례로 왼쪽 뺨을 스치는 관통상을 입었다. "조금만 얼굴 안쪽으로 총탄이 지나 갔더라면 전사했을 뻔했는데 천운을 타고 났다"고 말하는 문옹은 병원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연이은 전투에 참전했다. 그때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어 지금은 보청기나 부인의 도움 없이는 의사 소통을 못하는 등 전쟁의 상흔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두번째 고비는 52년 10월경 강원도 사창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중대원 전원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일이다. 나중에 살아 남아온 중대원이 1개 분대원 정도였다. 문옹은 "일생 중에서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고 지금도 같이 훈련 받던 전우들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며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후 스물두 살 되던 53년 10월 31일 간부후보생 6기로 임관, 58년에 중위로 전역하였다. 51년 8월 강원도 현리에서 중공군을 생포한 공로로 그해 12월 30일 금성화랑무공훈장 수여자로 결정돼 수여증만 받았으나 그마저도 잃어 버렸다.
그후 부인(이호순·69)이 육군본부 등에 어렵사리 확인 절차를 거친 끝에 최근에서야 훈장 수훈자라는 사실 확인과 함께 보훈청으로부터 국가유공자증을 받게 된 것이다. 문옹은 "뒤늦게나마 부대와 관계당국의 도움으로 큰 영광을 얻게 돼 무어라 감사의 말을 전해야 될지 모르겠다"며 "7월 초에 입대하는 외손자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