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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공무원 한 길, 대전시청 김석기 자치행정국장

등록 2004.06.25 09:19수정 2004.06.2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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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전시청 김석기 자치행정국장

대전시청 김석기 자치행정국장 ⓒ 권윤영


“지난 66년 1월 20일에 첫 발령을 받았고 그 해 5월 16일 대전시로 전입발령을 받았습니다.”


어느덧 40여년이 훌쩍 지난 일이건만 대전시청 김석기(58) 자치행정국장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껏 초심을 잃지 않고 공직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39년 세월 동안 대전시 산하에서 근무한 이력답게 자부심도 크다. 대전시 공무원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대전에서만 근무해온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그에겐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선거를 11번이나 치러낸 선거 베테랑, 자치행정국 업무의 일인자, 그리고 모범 공무원까지.

동료들이 인정하고 칭찬하는 김 국장의 장점은 투철한 봉사정신과 강력한 리더십의 조화에서 오는 인화력이다. 이런 인정을 바탕으로 지난해 연말에는 대전시청 직장협의회에서 700여명의 투표를 거쳐 ‘가장 닮고 싶은 선배, 올해의 베스트 간부’를 선발했는데 그가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시에서 기반을 잘 닦아 놨고, 직원들이 잘 해줬기 때문인데 괜히 한 것도 없이 이런 공로패를 받아서 쑥스럽기도 하다”라고 겸손해했다.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현재 위치인 3급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일들을 겪었던 그는 그 많았던 일들을 하나하나 가슴 속에 아로새기고 있다.

“지금은 자치행정과라고 하지만 과거에는 시정과라고 했어요. 39년의 세월 중 무려 17년 동안 이곳에서 근무를 해서 자치행정과 업무는 이제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죠. 지난 99년에는 대전 대흥동 구청사를 마감하고 신청사 시대를 열었고요.”


지난 66년 첫 발령 당시의 대전 시민은 36만명. 지금은 150만명에 이르는 도시로 성장했다. 김 국장은 주요 건물, 주요 도로가 지어진 시기 등 대전 발전사를 꿰고 있는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a 그는 동료들에게 모범적인 공무원으로 통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모범적인 공무원으로 통한다. ⓒ 권윤영


지난 월드컵 기간에는 문화체육국장으로 근무하며 월드컵 성공적 개최에 기여한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2000년부터 2년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고생도 많았던 만큼 보람도 매우 컸다. 그는 월드컵 기간에 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첫 경기 때는 2개의 대형스크린을 설치했는데, 한국팀이 좋은 성적을 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응원전을 펼치기 시작했잖아요. 다음 경기 때는 4군데 설치했는데도 시민들은 대형스크린을 계속 요구했죠. 나중에는 그 설비를 갖고 있는 사람이 배짱을 부리며 가격을 올리더군요.”

전국적으로 대형스크린 설치 개수가 늘어나자 수요가 부족했고 그것을 구하기 위해 다른 도시까지 찾아 나서기도 했다. 1500만원이던 대형스크린 대여비가 배를 넘어섰지만 계속되는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대형스크린 설치는 최대 12개까지 늘어났지만 다른 도시와 비교하며 더 요구하는 시민들의 질타를 받아야만 했다.

낮 경기 시에는 대형스크린이 잘 보이지 않아 대전월드컵경기장과 한밭종합운동장을 개방하기도 했다. 스탠드에 4만 명이 들어차고, 복도까지 많은 인원을 수용했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이 물 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결국 경기장까지 개방하기로 결정해 잔디에도 10만명 이상의 인원이 앉아서 한국팀을 응원할 수 있었다. 시민들이 마음 편히 거리 응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보이지 않는 숨의 노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김 국장이 공무원이 된 이유는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자전거를 타고 해어진 바지를 입고 출퇴근하던 청렴결백했던 아버지를 동경했다. 그래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단 한번도 후회는 없었다.

“지난 66년 초봉이 3200원 정도였어요.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하숙비가 3천원이었고, 쌀 한가마가 3천원이었으니 상당한 박봉이었죠. 토요일마다 집에 내려가서 아버지께 천원을 타 와야 생활할 수 있었답니다. 70년대 새마을 운동 시절에는 용돈을 아끼기 위해 점심을 굶거나 걸어서 다녔던 적도 많았어요.”

과거에는 봉투로 월급을 받으면서 ‘이게 내가 일한 대가구나’ 싶기도 했지만 요즘은 계좌이체로 월급이 들어오기 때문에 내역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받을 뿐이다. “왠지 보람이 덜 한 것 같다”는 그다.

첫 월급통투부터 지금껏 받았던 월급봉투까지 모두 보관하고 있는 김 국장은 언젠가 둘째 아들에게 이것들을 넘겨줄 생각. 항상 마음속에 자식 중 1명이 공무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 바람대로 그의 둘째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 3대째 공무원이 탄생한 것이니 만큼 그의 기쁨은 컸다.

결혼 전 6년 동안 아내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꼼꼼한 면을 지닌 그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작성했던 업무보고, 행사내용, 시내동향 등 각종 기록관리와 자료 역시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모아서 언젠가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2006년 6월이면 정년퇴직을 합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시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기에 보람은 크지만 아쉬움은 없어요. 모든 공무원들이 자기 업무에 프로의식을 갖고, 그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근무하기를 당부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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