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기 때문에 더 어렵다…"

책 속의 노년(73) :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

등록 2004.06.25 10:17수정 2004.06.2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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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무하던 노인복지관 꼭대기 5층은 중증 치매 어르신들을 단기간 돌봐 드리는 '치매 단기 보호소'였다. 보증금과 이용료 모두 상당히 비싼 유료시설이었는데, 서른 명 가까운 어르신들의 대부분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야 했고 몇 분은 하루 종일 꼼짝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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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리

사회복지사와 간호사, 간병인, 영양사, 조리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등이 고정 인력이었고 그밖에 음악치료, 미술치료, 원예치료 등의 전문가들이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회복은 어렵더라도 남아있는 기능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 모든 활동과 프로그램의 목표였다.


가족들의 방문은 언제든지 가능해서 퇴근길에 매일 들르는 아들도 있었고, 휴일이나 명절에는 어르신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싸 가지고 와서 온 가족이 모이기도 했다. 물론 그 중에는 다달이 이용료만 꼬박꼬박 낼 뿐 얼굴 한 번 내밀지 않는 보호자도 있었다.

나는 같은 복지관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서 가끔씩 들르는 정도였다. 어느 날인가 어르신들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식사를 떠서 먹여 드리고, 몸을 씻겨 드리는 직원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어르신의 보호자인 딸이 감탄하며 "정말 천사가 따로 없네요. 나는 내 어머님인데도 어렵던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그 때 간병인으로 오래 일해오신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전문 직업인의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물론 어르신에 대한 정과 사랑도 있지만, 저도 제 부모님께는 이렇게 못하지요." 그러면서 멋쩍다는 듯 씩 웃으시는 것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오래 살고, 또 오래 사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가장 큰 부담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바로 노인 부양과 수발의 문제이다.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의 저자는 노령화의 길을 우리보다 약 10년 정도 앞서 가고 있는 일본에서도, 노인복지의 모범으로 꼽히는 '야마토마치'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일 년 동안 머물면서 경험한 그 곳의 노인복지 체계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야마토 모델'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의 노인복지 체계는 한 마디로 '재택 개호 시스템'이다. 여기서 개호(介護)란 영어의 케어(care)를 말하며, 우리말로는 '수발'로 바꿀 수 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개호복지'니 '개호복지사 자격증'이니 하며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경우가 많이 눈에 띈다. 나는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옮길 경우에만 '개호'로 표기하려고 한다.

"재택 개호란 시설 개호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노인 혼자거나 노부부가 사는 세대, 또는 자녀와 동거를 하더라도 맞벌이 등으로 낮 동안 노인을 돌볼 사람이 없는 가정에 간호사나 홈헬퍼가 방문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홈헬퍼를 우리 나라에서는 '가정 봉사원'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만성 질환을 관리하는 간호 서비스는 물론이고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 식사 등을 돌보는 수발 서비스가 들어가며, 세탁이나 청소, 식사 준비 같은 가사 지원 서비스도 포함된다.

또한 집으로 방문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외에도 낮 동안 시설에서 돌봐드리는 데이 서비스(Day Service, 우리나라의 주간보호소)와 보호자의 질병이나 여행, 특별한 사정으로 단기간 노인을 보호해 드리는 숏스테이(Short Stay, 우리나라의 단기보호소) 등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시행하고 있는 복지 서비스들을 특별히 '야마토 모델'이라 부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다. 일본의 고령화가 심각해지기 한참 전인 30년 전, 세 명의 의사가 야마토마치를 무대로 고령사회의 문제점을 예견하고, 의료·보건·복지의 통합을 목표로 농촌검진센터(보건)와 재택개호센터(복지), 종합병원(의료)을 함께 만들어 예방과 치료와 재활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구상한 것에서 시작되었기 때문.

우리에게도 이런 서비스들이 다 있지만, 차이라면 그 서비스들이 어떤 일관된 흐름 속에 이어진 것이 아니라 다 제각각 제공되고, 그래서 부족하거나 혹은 중복 공급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가정과 지역사회와 행정 조직이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야마토마치시에서는 그것을 이루었다.

노인 수발의 극심한 부담과 그에 따른 소진이 가족 갈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가정 파탄의 원인이 되는 일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목격하는 일이다. 부모님이 노쇠해 치매나 뇌졸중 등의 질병으로 자리에 누우셨을 때, 어떤 대책이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자.

늙고 병든 남편 간호에 지친, 역시 늙은 아내가 간병의 짐에 눌려 병이 나거나 심지어는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도 있고, 각자의 사정으로 부모님의 병 수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면서도 남의 눈이 무서워 시설에 모시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며 병든 분을 홀로 계시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자리에 누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종잡을 수 없이 돌아다니면서 위험한 행동도 불사하는 치매 환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돌볼 사람은 없고 시설에 모시기는 그 문턱이 너무 높으니 결국 방 문을 바깥에서 잠그고 일터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들을 별스러운 불효자, 불효녀라고 할 수만은 없다.

'외로운 노인과 고단한 가족의 희망 찾기'라는 부제처럼 노년과 싸우는 노인과 무너지는 가족 신화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저자 역시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분들이 행복하다는 생각에서,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돌보는 자식보다 차라리 '시설 가족'의 전문적인 보살핌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가고 있음을 책에서 느낄 수 있다. 어떤 결론부터 던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어서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공감을 하게 만들어준다.

야마토마치시의 성공에서 배워서 이 땅에 적용할 방법까지는 저자가 제시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하나의 모델을 소상하게 소개한 것만으로도 뜻깊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고령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복지를 위한 재원의 마련과 세대간 갈등 해소라는 두 측면을 봐야 한다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모두들 공감하는 노인 문제를 부양과 수발이라는 틀을 통해서 본 것은 의미가 있지만, 노인과 가족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데다가 일본 노인복지제도까지 골고루 짚어나가다 보니 중복되는 이야기가 많아 아쉬웠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중간에 끼워 넣은 통계 자료가 오히려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는 점이었다. 어느 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통계 자료는 과감하게 포기하고, 일반 독자를 위해 처음의 편안한 흐름을 유지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료였다면 책 뒤에 따로 모아 처리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야마토마치시의 이야기에만 좀 더 집중했더라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준비해야 할 노인복지 체계의 좋은 본보기 교본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지역사회에 머물며 생생하게 겪은 경험담에서 우리들이 참고하며 나아가야 할 주제들을 길어 올린 것은 전적으로 저자의 능력일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겠지만 선각자들의 뛰어난 통찰력과 전문가·가족·지역사회·행정 부처의 연계로 제대로 된 '노인을 위한 재택 수발 체계'를 갖춘 일본 야마토마치시가 부러웠다. 또 노인복지 전공자나 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직접 가서 살펴보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저자의 능력 또한 부러웠다. 나를 비롯한 노인복지 현장 실무자들은 오늘도 책을 통해 배우는 수밖에 없어, 이 책을 읽고 모여 토론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 - 외로운 노인과 고단한 가족의 희망 찾기

김동선 지음,
궁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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