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음은 없다!"

영화 속의 노년(81) : <아버지와 아들>

등록 2004.06.18 18:43수정 2004.06.1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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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레오는 영업사원으로 평생 길에서 살면서 아들 셋을 길렀다. 아내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아들들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일년에 한두 번, 그것도 다 따로 따로이다.

특히 큰아들 다비드와 둘째 아들 막스는 사이가 몹시 나빠 서로 만나지 않고 지내온 지 벌써 5년이다. 아버지 역시 자신의 동생과 10년 동안 왕래가 없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화해한 경험이 있어 더 속상하다.


어느 날 가슴이 아파 병원에 실려갔더니 혈전(혈관 안에서 피가 엉겨 굳은 덩어리)이 조금 있을 뿐, 심장은 이십대 못지 않게 튼튼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는다. 의사는 바로 다른 사람 아닌 동생 조세프이다.

병원에서 하룻밤 자게 된 아버지는 궁리 끝에 꾀를 낸다. 아들들에게 자신의 병이 위중하다며 같이 캐나다의 퀘벡주로 고래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본 텔레비전에 마침 고래가 나왔던 것뿐이지만, 아버지는 이 여행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우긴다.

큰아들 다비드는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둘째 막스는 형의 회사에서 같이 일하다가 그만두고 나오면서 형과 등을 돌리게 되었고 지금은 실업자 신세다. 막내 시몽은 큰형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아직 미혼이다.

가기 싫은 여행에 마지못해 나선 첫째와 둘째 사이에서 아버지는 전전긍긍하면서도, 둘이 엉겨 붙어 싸우기라도 하면 가슴을 붙잡고 쓰러지는 척 하는 등 나름의 전략으로 여행을 해 나간다. 동생 조세프가 혹시라도 아들들에게 자신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할까 두려워 큰아들의 휴대폰을 물 속으로 던져 버리기도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두 아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심기를 살피는 아버지는 한 마디로 너무 귀엽다. 아들들을 화해시키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안타깝고 심각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절로 웃음이 나오게 재미있으면서도 그 속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어 편안하다.


한바탕 소리를 질러가며 싸우는 두 아들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말리거나 속상해 하기보다는, 드디어 서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며 오히려 기뻐한다. 생긴 모습만큼이나 넉넉하고 느긋한 아버지는 이렇게 이 여행의 목표를 이루어가기 시작한다.

중간에 술집에서 시비가 붙자 삼형제는 한 마음이 돼서 싸움을 벌인다. 경찰서 유치장에 세 아들이 갇히게 되자 아버지는 풀어달라고 호소를 하지만 거절당하자 간곡히 부탁을 해 당신도 유치장으로 들어간다.


네 명의 부자(父子)가 이리 저리 누운 유치장 안에서, 아들들은 서로의 사정을 털어 놓고 아버지 흉도 본다. 자는 척하며 다 들은 아버지는 그만 삐치고 만다. 또 한 번은 주유소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길을 떠났는데 자기들 이야기에 팔려 아버지를 놔두고 출발한 것을 뒤늦게 발견해 차를 돌리기도 한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으로부터 치료사를 소개받고 산 속 농장을 찾아간 네 사람은 그 곳에서 마도라는 여인과 그의 딸 엘렌을 만난다. 그 집에 머무르면서 아버지가 자연 요법으로 치료를 받는 동안 아들들은 자연에 파묻혀 몸을 움직여 일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가 새알 초콜릿을 약 대신 먹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 세 아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떠나고, 그 뒤를 따라 트럭을 몰고 달려간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큰 부상 없이 깨어나지만 응급 치료를 한 의사에 의해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병이 없음이 드러난다. 세 아들은 치료사 마도의 힘으로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생각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그런데 막내가 의사인 삼촌 조세프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려고 전화를 하는 바람에 그만 그동안 아버지가 아들들을 깜쪽같이 속여온 사실이 환하게 드러나고 만다….

이제 마도와 엘렌이 사는 농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바다에 서서 기다려 보지만 고래가 모여들 철이 아니니 고래가 있을 리 없다. 아버지가 커피를 사러 간 동안 바다를 등지고 돌아서서 아버지의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들들 뒤로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물을 뿜는다. '보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이야기 그대로 아버지만 그 고래를 보았다.

좋은 아내 만나 아들을 셋씩이나 얻은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반목하는 두 아들이 안타까워 아들들을 속여 떠난 여행길에서 아버지는 목표 달성은 물론 그 때까지의 인생에서 얻지 못했던 수없이 많은 것들을 얻었다. 그것은 아들들 또한 다르지 않다.

서로에게 잘못한 일들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사정을 나눌 수 있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확인했다. 심한 외로움과 약간의 혈전이 아버지의 진짜 병이었지만, 두 아들의 화해는 그들 자신은 물론 아버지와 동생에게도 새로운 관계 맺기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아버지의 '외로움이란 병'이 저만치 물러가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각자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도 아버지와 아들들은 여전히 바쁘게 그리고 가끔은 싸우며 살겠지만, 서로의 소중함을 확실히 깨달은 그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좋은 노년 영화, 가족 영화로 꼽을 만하다. 죽기 전에 자식들을 화해시키겠다는 늙은 아버지의 노력이 무겁지 않게, 오히려 유쾌하고 재미있게 그러나 충분히 가슴 뭉클하게 드러나 있어 부모님과 아이들 모두 한 자리에 앉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이번에는 여행을 가지 못하고 다음에 꼭 가겠다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씀하신 한 마디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하는 말씀이었다. "이 다음은 없다!"

다른 형제나 다른 가족이 부모님께 못해 드린다고 탓하며 비난할 것이 아니라, 내가 못하는 일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 것이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결심한 것이다. 이 결심을 잘 지킬 수 있기를. 나이 드신 부모님께 이 다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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