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사람들도 미쳐서 살았다

정민이 쓴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 <미쳐야 미친다>

등록 2004.06.29 08:55수정 2004.06.2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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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미쳐야 미친다>

책 <미쳐야 미친다> ⓒ 푸른역사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처럼 '미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졌던 조선 시대 학자들의 삶이 이 한 마디의 말로 인해 현대인들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조선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광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자신이 관심을 두고 이야기하는 인물들이 '그 시대의 메이저 리거들이 아닌 주변 또는 경계를 아슬하게 비껴 갔던 안티 혹은 마이너들'임을 밝힌다. 이들의 삶이 현대의 우리에게 와 닿는 이유는 우리 현실 속에도 대단한 메이저와 별 볼 일 없이 취급되는 안티, 마이너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조선시대의 안티와 마이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들의 삶에 대한 열정과 탐구 정신이 절절히 느껴진다. 이것은 세기를 초월하는 것들이기에 가치와 의미가 있으며 멋지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 공정한 룰이 지켜지는 시스템을 사람들은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 말이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세상이 그처럼 공정하지도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이 제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바른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림 당하고, 부족한 것들이 작당해서 능력 갖춘 사람을 왕따시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상 있는 일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언제나 능력 있는 이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역사는 늘 가려진 인물들을 어둠 속에 묻어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 숨겨진 인재들을 부각시키고 제 가치를 찾도록 해 주는 것 또한 역사일 것이다. 정민 교수의 작업도 역시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정직했던 학자 김영. 천문학에 뛰어난 그의 재능을 시기한 사람들은 그를 모함하고 궁지로 몰아간다. 그래서 김영은 결국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파묻혀 혼자 연구하며 지적 희열로 만족한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길이 남아 우리나라 천문학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당대의 그는 밥을 굶어 머리를 푹 숙이고 피곤해 꾸벅꾸벅 조는 사람처럼 다녔다고 한다. 서유본은 그를 질투한 관상감원들이 김영을 두고 면전에서 욕을 했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 이야기는 한편으론 가슴 아프다. 가난 때문에 누이와 어머니를 영양실조로 잃었는데도 학문에 빠져 지냈다는 이덕무. 이런 그를 임금 정조는 특별히 아껴 책 교정 말고 스스로의 저작을 남길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하였다고 한다.


그런 그는 "차라리 백 리 걸음 힘들더라도/ 굽은 나무 아래선 쉴 수가 없고/ 비록 사흘은 굶을지언정/ 기우숙한 쑥은 먹을 수 없네" 라고 노래를 부르며, 떳떳한 삶을 지향하였다.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옛사람들의 멋진 삶의 정신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는 이처럼 소외되었지만 열정과 신념이 있었던 조선 지식인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이미 여러 차례 얘기되어 온 이황과 이이 같은 메이저가 아니라, 서얼 출신이고 가난하게 살았던 마이너들의 이야기들을 말이다. 그리고는 인재를 쓰지 못하는 병든 사회 시스템에 대해 통탄한다.

"품은 식견을 세상을 위해 쓰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김삿갓과 같은 시인의 존재는, 지식인을 고작 말장난이나 하면서 경계인으로 떠돌다 죽게 만든 병든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일깨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룰 수 없는 꿈을 쫓아 긴 밤을 한숨쉬며 애태웠을까?"

과거 시험만 보면 급제를 할 정도로 뛰어났던 선비 노긍은 신분 때문에 세상에 올곧게 등용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인정받지 못했던 문필가 허균과 화가 이정의 우정은 그들이 남긴 글 속에서나 비범한 재주를 뽐내며 존재한다.

"서쪽에서 온 사람이 이정이 죽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참말입니까? 통곡하고 피눈물을 흘립니다. 하늘이여 아! 애통하도다. 내 누구와 더불어 세상 밖에서 노닌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 그림을 중히 여기지만 나는 그 사람을 중히 여겼다오. 그대 또한 이를 아시잖소? 풍류가 문득 다하고 말았으니,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소?"

아홉 살이나 어린 무명 화가의 묻혀버린 재능과 대나무처럼 강직한 삶의 태도를 안타깝게 여긴 허균. 그런 그 또한 세상을 등지고 엉뚱한 행동을 일삼으며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더러운 세상을 뿌리째 뒤엎을 반역을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한 채….

"사람들아, 나의 거처가 누추하다고 말하지 말라. 정말 누추한 것은 더러운 명예를 쫓아다니는 일, 이 한 몸 죽고 나자 이름도 함께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여 세상에 살다간 아무런 자취도 남지 않는 일, 평상을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손가락질만 받다가 죽는 것이다.

쑥대 지붕 아래에도 우주를 덮을 큰 자유가 있다. 도연명도 무릎을 겨우 들일 만한 좁은 집에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구차한 살림을 살았다. 그러나 보라. 그의 이름은 백대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고 뭇 사람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대저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그의 소원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작품을 읽는다. 당시에는 마이너였지만 현재는 우리 삶을 향기롭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그런 작품들을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만남이란 맛남이다'라고 하여 맛있는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현대를 사는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옛 미치광이들과의 맛있는 만남'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 마이너인 자신의 삶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당시에는 소외되었던 허균의 작품이 300여년이 지난 이제야 빛을 발하듯이….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푸른역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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