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층 자제부터 먼저 전쟁터로 보내라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2)

등록 2004.06.30 19:08수정 2004.07.0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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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장에서 한 사형수가 용케 살아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장에서 한 사형수가 용케 살아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NARA
누군가를 무작정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고 따분하다. 아침부터 내도록 기다렸다. 괜히 일손이 안 잡힌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서가에 눈을 돌리자 마침 고종아우 김윤태군이 보낸 아무개 출판사에서 엮은 수필집 <조지훈>이 눈에 띄어 펼쳤다.

고종아우가 굳이 이 책을 보낸 것은 아마도 조지훈 선생이 나의 은사인 줄 알았기 때문이리라. 책을 펼치자 대부분 내가 알고 있거나 이미 읽은 작품들인데 그 중 '사꾸라론'이라는 글이 낯설어서 읽었다.

나는 1965년, 66년 이태 동안 지훈 선생님께 강의를 들었는데 그새 40년 세월이 지났다. 그런데도 책을 읽자 바로 앞에서 말씀하시는 듯 선생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인과의 대화'라고 하더니, 선생은 가셨지만 말씀은 그대로 남아서 생생히 들려주신다.

나는 선생이 들려주신 동서고금을 꿰뚫는 무궁무진한 시론이나 동서양 학문 얘기보다 파자놀이나 우스갯소리, 음담패설이 더 기억에 남아 있다.

"달밤에 개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럴 연(然) 자 입니다."
"나무 위에서 '또 또 또' 나팔 부는 글자는?"
"뽕나무 상(桑) 자 입니다."
"그럼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 한글 '스' 자다."

'사꾸라론'에서는 '골로 간다'와 '얌생이 몰다'의 어원을 풀이한다. 둘 다 해방 후에 생겨난 말인데, '골로 간다'는 말은 "골짜기로 데리고 간다"라는 말의 준말로 말을 듣지 않거나 반대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처형한 후 묻어 버리겠다는 무서운 말이라고 했다.

'얌생이 몰다'는 말은 의뭉한 농사꾼이 염소를 미군 부대로 들여보낸 후, 염소 찾으러 간다면서 부대에 들어가서 염소를 찾는 척하면서 미군 부대 물건을 훔쳐 나온 게 그 유래라고 했다.


말이란 그 시대상을 반영하기에 해방과 6·25 전쟁 그 무렵에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으니 그런 말이 유행되었나 보다. 그런데 '골로 간다'는 말을 새겨 보니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지난 1월 31일부터 3월 17일까지 미국 메릴랜드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머물렀다. 거기서 백범 선생 배후 진상을 밝히고자 현대사 자료를 열람하던 중, 2월 5일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가 당신이 NARA에서 발굴했다며 수십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 사진들은 1950년 4월 서울 근교 좌익 사범 처형 장면과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장면, 1951년 4월 대구 부역자 처형 장면으로 모두가 군인들이 좌익 사범이나 죄수들을 골짜기로 데려가서 처형하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온몸은 전율했고 할 말을 잃었다.

맥아더 기념관
맥아더 기념관박도
그리고 2월 25일 이 박사의 안내로 버지니아주 남단의 노폭(Norfolk)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에 갔다. 거기서 서울 근교 좌익 사범 처형 장면 비디오와 해방 후 좌익 사범들의 목을 자르는 장면을 보고 이데올로기를 떠나 내 동족이 이민족의 입회 하에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갔던가 애통해 하며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전쟁은 연극이나 영화가 아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젊은이들을 남의 나라 전쟁터에 내보내고자 한다. 내 나라를 지키는 일도 아닌데 남의 나라 전쟁에 젊은이를 내모는 일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나는 1970년대 초, 전방에서 소총소대장(제26사단 73연대)을 하면서 많은 파월 귀국자를 소대원으로 전입 받았다. 그 무렵 화기소대 한 병사는 이따금 정신 착란을 일으키다가 끝내 탈영하고 말았는데 그는 어느 날 나에게 와서 자기가 죽인 월남인의 얼굴이 떠올라서 미칠 것만 같다고 했다.

그때도 그랬다. 세계 평화를 들먹거렸다. 정히 파병을 하려면 대통령 국무위원 국회의원 자제부터 먼저 보내라. 내 자식을 보낼 수 없으면 당신들이 가라.

1951. 4. 대구 근교의 부역 혐의자들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삽을 들고 군인들을 따라 골짜기로 가고 있다.
1951. 4. 대구 근교의 부역 혐의자들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삽을 들고 군인들을 따라 골짜기로 가고 있다.NARA
농사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구덩이를 파고 있다
농사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구덩이를 파고 있다NARA
미 고문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헌병들이 실탄을 장진하고 있다
미 고문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헌병들이 실탄을 장진하고 있다NARA
부역자 농사꾼들은 체념한듯 머리를 구덩이에 박고 있다.
부역자 농사꾼들은 체념한듯 머리를 구덩이에 박고 있다.NARA
헌병들이 구덩이 속의 부역자에게 사격하고 있다
헌병들이 구덩이 속의 부역자에게 사격하고 있다NARA
헌병들이 부역자들이 가져온 삽으로 구덩이를 메우고 있다
헌병들이 부역자들이 가져온 삽으로 구덩이를 메우고 있다NARA
1950. 4. 서울 근교 좌익사범 처형 장면, 총살한 곳에 가서 확인 사살하고 있다
1950. 4. 서울 근교 좌익사범 처형 장면, 총살한 곳에 가서 확인 사살하고 있다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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