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92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7.02 09:45수정 2004.07.0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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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석달 후였다. 에인은 공주의 배를 타고 에리두로 향하고 있었다. 전에 모카 부두에서 그와 닌을 실어왔던 그 배였다.


두수가 멜루하에 도착한 것은 열흘 전이었다. 그는 제후의 전령으로 '급히 귀환하라'는 통보를 가져왔고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엔키가 더 흥분을 해서 소리쳤다.

'장군님,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장 배를 대기시켰고 또 공주까지 동행해 이렇듯 귀환 항행 길에 오른 것이었다.

다시 엔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배 안에서의 생활이 벌써 일곱 날째가 되건만 그는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의 청중은 두수뿐이었다. 두수에게는 그런 화법을 가진 사나이가 처음이라 당장 매료되어 버렸지만 에인에겐 지겨움의 연속이었다.

에인은 머리를 식히려고 밖으로 나갔다. 갑판 뱃머리에 서자 더할 수 없는 시원함이 거기에 있었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선선했고 끝간데없이 펼쳐진 바다는 정신적 요람 같았다.

'아, 정말 편안하구나….'


생각해보니 자신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는 것은 늘 자연뿐이었다. 사람은 그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자연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사람과 자연 사이에 왜 그런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멜루하까지 가서 깨달은 것은 인간이 주는 고통 또한 그 형태가 갖가지라는 것이었다.

니푸르의 장로들이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주었다면 엔키는 끊임없이 그의 정신을 괴롭혔다. 그래서 두수가 귀환 소식을 가져왔을 때도 그가 춤추고 싶을 만큼 기뻤던 것도 이제 엔키에게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실 에인에게는 엔키가 이해하기 힘든 상대였다. 엔키는 성격이 격렬한데다 기분 또한 대단히 변덕스러워서 하루에 몇 차례나 꼭지 점과 바닥을 오르내렸다. 방금 전까지도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호기를 부리다가도 다음 순간엔 또 세상 전부를 잃은 듯 절망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병적으로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모국어에 굶주려 그렇게 쉼 없이 지껄이고 싶은 것이라고 이해하려고도 했으나 나중에는 그것이 고문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그는 실천보다 말만 앞세웠고 몸으로 해야 할 모든 일까지도 말로서만 대행하는 사람이었다.

뱀 사냥을 갈 때도 그랬다. 마차는 더운 사막 속으로 달리는데 그는 입도 마르지 않는지 쉬지도 않고 설을 풀어댔다.

'누가 뭐래도 사막의 왕은 뱀이지요. 사막 전체가 그들의 궁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쨍쨍한 사막을 가다보면 가끔 모래에 누워 있는 무지개를 볼 수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면 그건 오색이 영롱한 뱀이고, 또 그렇게 알록달록한 것이 또 용만큼이나 큽니다.'

'엔키 공, 이제 허풍을 좀 줄이시오. 뱀이 용만큼이나 크다는 소린 내 생전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놈들은 정말이지 집채만큼 큽니다. 뭐, 장군님도 잠시 후면 보시게 될 테니 그때 확인하십시오.'
'그럼 그 뱀 이름은 대체 뭐요? 우리 식으로 용이나 이무기 뭐 그런 것이라도 있을 것 아니오?'

'여기서는 무지개와 소리 뱀이 흔합니다. 소리 뱀은 말입니다. 대가리를 바짝 쳐들고 꽁지로는 소리를 내고 다녀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데, 또한 사막의 파수꾼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지요.'
'그런 놈도 사냥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그놈을 잡을 땐 말입니다. 올가미 외에도 작살이 있어야 하는데, 그 작살은 놈이 사람을 공격하려고 입을 쫙 벌릴 때 재빨리 던져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잠깐이라도 방심해서 그 순간을 놓치면 자신이 이미 놈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지요.'

그때쯤 에인도 슬금슬금 흥미가 동했다. 뱀이 용도 아니면서 크기만 하다면 이무기나 강철이처럼 못된 성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런 놈이라면 보이는 족족 잡아보는 것도 심신을 위해 좋은 일이라 싶었다.

한데 엔키는 뱀이 출몰한다는 사막에 도착해서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야기 방향을 돌려'남자라면 누구나 놈과 마주했을 때의 그 전율을 맛보고자 한다, 그래서 왕실의 비계머리들도 가끔 그 놀이를 즐긴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오히려 화를 당한다, 얼마 전에 태자와 사냥을 나갔던 한 공후가 뱀에게 잡아먹혔다, 왕실에서 그 뱀을 잡을 잡기 위해 열명의 하인을 보냈지만 그 중 세 명이 또 희생되었다, 자, 우리도 그만 이쯤에서 돌아가자'고 발뺌을 했다.

그래서 에인은 용만큼 크다는 뱀도, 소리를 낸다는 그 희한한 뱀도 구경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말하자면 엔키는 그런 사람이었다. 함께 모험을 즐기기보다는, 그 모험을 서로 공유하기 보다는 오직 자기의 말과 동작에 상대를 잡아두려는 표충망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바람이 선들선들 목으로 감겨왔다. 그가 바람도 꿀처럼 달다고 느낄 때 한 흑인이 긴 상아 뼈를 들고 나와 여신의 흑단 조각상 앞으로 다가왔다. 나팔수였다. 그 나팔수는 선수 기둥 앞에 똑바로 서더니 그 뿔을 불기 시작했다.

뿔 나팔 소리는 부우, 부우, 하고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고, 그 소리가 닿을 듯한 지점에서 작은 물체들이 꼬물꼬물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리두 항구였다.

"오, 내 얼마나 너를 그리워했느냐! 너 또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리두, 나의 영원한 연인이여…."

에인이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엔키였다. 언제 올라왔는지 그가 옆에 서서 그렇게 감탄사부터 풀어댄 것이었다. 벌써 공주도 두수도 닌도 모두 올라와서 저마다 아련한 눈길로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인에게도 그 항구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었으나 오늘은 아무 생각도 불을 밝히지 않았다. 방해꾼이 먼저 그의 감상까지도 차용해버린 때문이었다.

마침내 배가 항구에 닿았다. 공주의 시중들이 재빨리 삼판을 놓았고 그 위에 양탄자를 까는 사이 모두 내릴 채비를 했다. 에인과 닌, 두수 그렇게 차례를 서는데, 엔키가 공주부터 먼저 사다리로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도 곧 뒤따라 내려가서 공주의 손을 잡고는 양탄자가 깔린 그 삼판 위로 마치 왕이 나가듯 뭍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서 기다리던 제후는 엔키는 본 척도 않고 삼판으로 달려가 덥썩 에인의 손부터 잡았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장군님."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불러들인 것이오?"

에인이 퉁명스레 물었다. 제후의 그런 모습들이 전혀 현실 같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후는 아주 공손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잘 풀렸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참모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후가 에인을 대동하고 뭍으로 걸어나올 때 엔키의 시중들이 어깨에 매고 온 궤짝을 제후 옆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멜루하의 특산물인 상아 뼈와 보석 등이었다. 제후도 그 내용물을 아는지 '마차로 옮겨주게'라고 말한 후 앞서갔다. 엔키가 시종들에게 그를 따라가라고 지시를 내린 후 에인 옆에 다가서며 빠르게 말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공주를 대동했습니다만, 다음엔 혼자 올 것입니다."

에인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듣지도 않았다. 석 달간이나 시달리면서 혼자 터득한 지혜란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즉시 자신의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에인이 마차 앞에 도착했다. 그때 닌의 어머니가 뛰어나와 닌을 얼싸안았고 제후는 그 앞에 있는 말을 끌어와 에인에게 말고삐를 건네주었다. 천둥이가 아니었다. 에인이 물어보았다.

"천둥이는?"

제후가 가만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참모들은 어디에 있소?"
"니푸르에서 기다립니다. 어서 가시지요."

에인이 말에 오르려고 할 때 엔키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거사가 있으면 속히 연락해주십시오. 저도 돌아가는 즉시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에인은 그 말도 듣지 않았다. 대신 말에 오르며 인사말을 했다.

"신세 많이 졌소이다."

에인의 인사말은 자기가 했던 말에 대한 적당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엔키는 서둘러 말했다.

"아, 신세는요, 당연히 제가 할 일이지요. 그럼 연락 주십시오."

에인과 제후의 말이 앞서고, 닌과 두수 등을 태운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엔키는 그들 일행이 항구를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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