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음 하나로 나라가 뒤바뀐 사연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어 교육의 필요성

등록 2004.07.02 14:02수정 2004.07.02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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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지인으로부터 일본에서 인도네시아인이 오니 잘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섰습니다. 성남 모란역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아침 7시경에 모란역에 도착했는데, 약속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했더니 그들도 모란역에 도착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역 출구 번호를 지정하고 만나기로 했지만, 1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 다시 전화 연락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역시 제가 나타나지 않아 이상해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하철역 바깥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사람들은 지하철역사 안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나자마자, 인도네시아인을 데리고 나온 사람은 약속이 있다면서 먼저 떠났습니다.

지인이 소개해 준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이마에 주름이 많은 40대 중반의 교수로 동경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리완또 교수는 인도네시아 국립대를 졸업한 후, 호주와 영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인도네시아 사회문화연구원 소속으로 '국제이주'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동경대에는 일년간 파견 나온 것이라 했습니다.

리완또 교수는 느릿한 말투지만 또박또박한 말투로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만나자마자 질문을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출근 시간이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하철 안이었는데도 사무실로 가는 동안 내내 한국의 외국 인력 정책과 그와 관련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 외국인이주노동자 공동체 현황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저는 그런 그에게 나중에 사무실에 가면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리완또 교수는 사실은 일정이 빠듯해서 부득불 조급하게 물어댄다고 했습니다.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그는 오후에 창원에 내려갈 일이 있고, 다음날은 '북경 유니버시티'에서 국제이주노동 관련 강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리완또 교수가 일본에 있다보니, '베이징대'를 '북경유니버시티'라고 말하는가 보다 하고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한국 내 외국인이주노동자 관련 자료들을 뒤적이던 그는 전화를 써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좋다고 해 놓고는, 어디에 걸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리완또 교수는 강의와 관련하여 '북경유니버시티'에 있는 인도네시아인 교수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화번호를 받아들고는 번호와 함께 적혀 있던 주소를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주소를 보고서야 저는 리완또 교수가 '북경유니버시티'라고 말한 대학이 우리나라에 있는 '부경대'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제가 왜 부경대라는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부경대에 있는 인도네시아인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줬습니다.

통화를 마친 리완또 교수가 부경대 교수가 통화를 하고 싶어한다면서 저에게 수화기를 건넸습니다. 여자였는데, 한국에 온 지 2년 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통화 중에 리완또 교수가 '부경대'를 '북경유니버시티'라고 해서 중국 베이징대로 생각했다는 말을 전하자, 호탕하게 웃으면서 "마살라냐 까"라고 답했습니다. '다 K발음 때문이지요' 하는 뜻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K발음을 'ㅋ'로 하지 않고, 'ㄲ'로 하기 때문에 리완또 교수가 '부꼉'이라고 말한 부분을 저는 '북경'이라고 듣고, '베이징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발음 하나 때문에 나라가 바뀌는 사건을 경험했지만, 저희는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화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만나다 보면 종종 겪게 되는 일이고 아주 사소한 일에 속합니다. 이처럼 발음상의 문제로도 엉뚱한 이해를 하는데, 우리말이 서툴러 단어 자체를 모르거나 도통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들과 통역 없이 대화할라치면 오죽하겠습니까? 자신의 임금체불 문제나 여러 가지 문제로 찾아왔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듣는 입장에서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거나,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위한 체계적인 한국어 교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국적으로 많은 외국인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서 한국어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 교실 운영이 제대로 된 곳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단 전문성을 갖춘 교사가 있는 곳이 드물고,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역시 꼭 배워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어교실을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제가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연다고 했을 때, 안산에 있는 어떤 신부님은 "센터를 열면 한국어교실은 절대 하지 말라"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습니다. 괜히 시작했다가 자원활동가들 피곤하게 만들고, 잘 되지도 않는 일 때문에 지친 자원활동가들이 떠나게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며 봉사하실 분이 계시면 가까운 외국인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를 찾아가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다 보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애환도 듣고 그들의 문화도 접하면서 우리 문화도 나누게 되고, 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와 이웃할 수 있는 길도 더 가까워질 테니까요.

"선생님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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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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