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이 풍년농사 지은 것도 죄냐"

[현장] 호남농민들 보리 야적시위... 전량수매·수매제도 개선 촉구

등록 2004.07.07 13:03수정 2004.07.0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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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후 전농 광주전남연맹 소속 농민 50여명이 보리 전량수매와 수매제도 개선을 요구하며 전남도청 앞에서 보리 야적시위를 강행했다.
6일 오후 전농 광주전남연맹 소속 농민 50여명이 보리 전량수매와 수매제도 개선을 요구하며 전남도청 앞에서 보리 야적시위를 강행했다.오마이뉴스 안현주

"속 모르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심으라는 양만 심지 그랬느냐고 한다. 그런데 어쩔 것이냐. 풍년이 들어 버렸는데... 농사꾼이 풍년농사 지은 것도 죄냐. 매일 논밭에 다니면서 풍년농사 지은 것이 결국 오늘 이 꼴이냐."

3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 성난 농심도 거세게 타올랐다. 이달 초부터 전남지역 시·군에서 보리 야적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6일 전남도청, 영암군청, 정읍농협, 김제시청 앞 등 광주 전남·북 지역 4곳에서 농민들의 보리 야적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도연맹(의장 허연) 회원 50여명은 이날 오후 2시 30분 전남도청 앞에서 기습적인 보리 야적 시위를 벌이고, 보리의 전량수매와 수매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또 이 과정에서 보리 야적 시위를 저지하는 경찰 150여명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판로 막힌 농민들, 야적 시위 날로 확산

6대의 차량에 나눠 탄 농민 50여명은 전남도청 앞에 도착하자, 곧바로 트럭에 싣고 온 보리가마를 도청 앞에 쏟아냈다. 그러나 경찰 150여명이 저지에 나서자 농민들은 보리포대를 뜯어 도청을 향해 뿌리는 등 격렬하게 반응했다.

농민들은 야적시위를 막는 경찰과 도청 관계 직원들을 향해 "제발 보리쌀 좀 가져가 달라"며 "농민들이 생산한 보리가 23만 가마나 썩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 농민은 바닥에 주저앉아 허탈한 심정으로 바닥에 쏟아진 보리쌀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이들은 "정부는 한해 옥수수 900만톤, 밀가루는 600만톤이나 수입하면서 농민들이 요구하는 23만톤 추가 수매를 외면하고 있다"며 "쌀보리의 자급수준이 65%인 반면, 맥주보리는 지금도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 150여명에 둘러싸여 농민들의 보리 야적시위가 가로막히자 농민들은 격렬히 항의하는 등 반발했다.
경찰 150여명에 둘러싸여 농민들의 보리 야적시위가 가로막히자 농민들은 격렬히 항의하는 등 반발했다.오마이뉴스 안현주
농민들은 전남도청 앞에 보리가마를 쌓아놓고 박준영 도지사의 면담을 요구했다. 농민들은 박 지사가 농민들의 쌀 개방 찬반 투표를 방해하는 문서를 해당 시군에 내려 보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농민들은 전남도청 앞에 보리가마를 쌓아놓고 박준영 도지사의 면담을 요구했다. 농민들은 박 지사가 농민들의 쌀 개방 찬반 투표를 방해하는 문서를 해당 시군에 내려 보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오마이뉴스 이국언
지난달 30일 무안군 농민들이 보리 800여 가마를 군청 앞에 야적하는 것을 시작으로 농민들의 보리 야적 시위는 이달 들어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지난 1일 나주농민들은 시청 앞과 농협 등에 6000여 가마를 야적한 것을 비롯, 해남군청 앞 300여 가마 등 야적시위는 광주 전·남북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6일 농민들의 보리 야적 시위는 전남도청 앞 이외에도 전북 군산, 김제, 정읍에서도 동시 다발로 벌어졌다. 김제와 정읍 농민 100여명은 이날 김제시청과 정읍농협 앞에 보리 4천여 가마를 쌓아놓고 정부의 전량수매와 수매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등 보리수매를 둘러싼 농민들과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한편 전남 영암에서는 농민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사이 군청 직원들이 보리 200여 가마를 실은 트럭을 몰래 빼돌려, 야적 시위가 무산되기도 했다.

"현 수매제도, 풍년이든 흉년이든 농민 희생만 강요

이날 전농 광주전남연맹은 성명서에서 "4년만에 찾아 온 보리 대풍으로 큰 기대에 부풀었지만 애써 수확한 보리를 썩혀야 하는 현실에 망연 자실 할 수 밖에 없다"며 "정부의 수매량 축소와 수매가 인하에 의해 계약량 이외의 추가 생산량은 처분할 길이 막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재의 수매제도는 풍년이든 흉년이든 농민들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며 "풍년으로 생산량이 늘었는데, 계약량을 핑계삼아 수매를 하지 않는 것은 농민들의 생존권을 도외시한 무책임한 행정이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농민들은 ▲수매제도 폐지 및 수매가 인하방침 철회 ▲보리 전량수매 ▲계약제도 면적단위로 변경 ▲농산물 대북지원 법제화 ▲쌀 개방 찬반 농민투표 방해 행위에 대한 박준영 지사의 사과를 요구했다.

한편 보리수매 대책과 관련 전남도는 최근 전농 광주전남연맹에 회신을 보내 "보리수매 약정제도가 현행 물량계약에서 파종면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농림부에 건의해 나갈 계획"이라며, 전남도 자체수매와 관련해서는 "전남도의 낮은 재정형편 상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

농민들, 야적시위 왜 나서게 됐나?
개방농정 위기 현실화...수매량·수매가 매년 줄여


약정제도, 즉 제한수매는 2002년산 보리가 출하되는 지난해 새로 시행된 제도. 정부에 의해 한해 약정량이 정해지면 일선 농협이 개별 농가와 약정을 맺는 방식이다. 문제는 약정량이 매년 줄어든 데다 수매가마저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데 있다.

전국 보리 생산량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전남이 올해 생산한 보리 수확량은 12만 8000톤. 그러나 계약 재배량은 쌀보리와 맥주보리를 합쳐 11만 3000톤에 불과하다. 지난해 약정 수매량이 12만 2200톤인 것을 감안하면 올해엔 8%가 줄어 든 것이다.

풍년농사가 더 걱정, 수매제도 바꿔야

전남도는 계약 재배량 이외의 초과 수확량이 1만 5000톤, 23만 가마(40㎏단위)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남도 한 관계자는 "올해는 일조량이 많고 수확기에 비도 오지 않아 몇 년만에 대풍을 맞았다"며 "수확량이 평년대비 10∼15% 증가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문제는 판로가 없다는 것이다. 쌀과 달리 23만 가마의 보리는 정부가 수매를 해 주지 않으면, 개별 농민으로서는 해결방도가 없는 상태다. 수매가도 농민들의 의욕을 잃게 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보리 수매가를 지난해 대비 4% 인하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최종 국회 의결만을 남겨두고 있다.

수매방식도 문제다. 정부는 생산량을 기준으로 약정을 체결하고 있는 반면 농민들은 파종면적을 기준으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수확량이 자연 기후과 밀접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정해진 양보다 많이 생산되는 보리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얘기다.

지난해 전남도의 경우가 그렇다. 전남도는 지난해 정부가 지정한 약정 수매량의 76%밖에 채우지 못했다. 파종기와 수확기때 잦은 비로 붉은 곰팡이병이 번져 수확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올해는 겨울 날씨가 좋고 별다른 자연재해가 없어 모처럼 풍년을 맞은 것.

그러나 오히려 풍년이 문제다. 내다 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약정 수매량 이외에는 판로가 막혀 있는 농민들로서는 흉년은 흉년대로, 풍년은 풍년대로 이중고의 상태에 직면해 있는 상태인 것.

보성에서 올라온 한 농민은 "현재의 수매제도는 풍년들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며 "하느님이라 해도 과연 정해진 양에 맞춰 생산할 수 있겠느냐"고 울분을 쏟았다.

"농민이 죽어야 할 문제라면, 우리가 죽겠다"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

"보리 몇 가마 더 팔아먹기 위해 온 것 아니다. 경찰 여러분, 왜 우리가 이 뙤약볕에 아스팔트에 나와야 하느냐. 왜 우리 맘대로 농사도 못 짓게 하는 것이냐. 공무원 여러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가 농약 먹고 죽어야 하는 것이냐. 우리 농민들만 죽고 나면 끝이냐. 그렇다면 우리 농민들이 죽겠다. 농민들이 죽고 나서도 식량주권을 지켜낼 수 있다면 우리가 죽겠다."


농민들이 울분을 쏟았다. 도청을 향해 거친 욕설도 퍼부었다. 농민들이 요구한 박준영 도지사의 면담은 농성 4시간여간 지난 오후 6시 30분경에야 이뤄졌다.

해남에서 올라왔다는 50대 후반의 한 농민은 농민들이 재배물량을 일부러 늘린 것 아니냐는 일부 시각에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보리는 습해 있는 곳은 아무리 농사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것"이라며 "농사를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3000여평의 논에 보리를 심었다는 그는 "생산량은 140가마인데 올해 배정된 물량은 90가마 밖에 안 된다"며 "막막하기만 하고 점점 길이 없는데, 앉아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느냐"고 말했다.

보성 득량에서 올라온 이정민(43)씨는 "정부에서는 농산물을 특화 시켜 보라고만 하는데, 보리까지 이 마당인데 뭘 심으라는 말이냐"며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내 놔 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단순히 매상 더 봐 달라는 것이 아니다"며 "이제 우리의 식량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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