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실험 결과가 하나 있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의 등에 소형 라디오를 달아서 걷지 못하게 해놓고 몇 년을 관찰한 것이다. 강아지는 해를 거듭해 덩치가 계속 커져도 여전히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집 안에 누워서만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냥 한 번 웃고 넘기기에는 환경이 만드는 무의식의 위력에 새삼 섬뜩함이 느껴진다. 이는 비단 동물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사람 그리고 사회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환경이 사회적 무의식을 형성하고 그것이 곧 사회의 진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최근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논란을 보면 자기 꼬리만 한 라디오를 업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강아지만 안쓰러운 게 아닌 듯하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마지막 남은 이라크 추가 파병의 이유는 한미동맹이다. 대량 살상 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미군의 이라크 포로 성희롱 사건이 터지면서 이라크 전의 명분은 오래 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라크 평화재건이라는 구호도 특전사와 해병대 등 전투부대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자이툰 부대의 구성을 보나, 평화 재건이라는 말에 눈도 깜짝 안 하는 이라크인들을 보나 허울이긴 마찬가지다.
이런 와중에도 한미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현실론은 아직 굳건하다. 그럴 법도 한 일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정부를 세워주고 6·25전쟁에서 대신 피를 흘려줬으며 고속 경제 성장의 뒷바라지를 해 준 든든한 큰형으로 우리는 미국을 기억한다.
그래서 미국과의 관계가 조금만 소원해져도 '안보 구멍', '경제 불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한미동맹과 국익은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에 '=' 관계로 뿌리깊게 자리 매김 했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한미동맹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국익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조금만 그 무의식의 안개를 걷어내다 보면 한미관계를 고려했다는 이라크 추가 파병과 국익의 연결고리는 갈수록 희미해진다.
우리에겐 국익을 위한 최고의 보험으로 인식되는 한미동맹에 미국은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미국 중심적으로 진행되는 주한미군 재배치에서 보듯 이미 한반도 내에서 한미동맹의 역할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북핵 문제에 있어서도 북한의 완전무결한 선 핵 폐기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미국을 우리는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어야 했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파병철회가 제2무역 파트너인 미국과의 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걱정은 근거가 없다. 무디스 등 해외신용평가기관들은 파병여부가 한국의 대외신뢰도와 관계가 없다고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또한 통상압력의 경우, 파병을 하겠다는 지금도 여러 부문에서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다. 통상마찰은 한미무역의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우리 혼자 한미동맹 외치며 우리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서 얻게 될 실리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한미동맹에 목을 매는 우리의 무의식은 라디오를 업은 강아지의 무의식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강아지가 라디오의 무게를 감히 이겨 볼 생각을 못 하듯 우리도 한미동맹의 불분명한 실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강아지는 실험이 끝나면 걷기 연습도 시켜주며 보살펴 줄 주인이라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무의식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이 벌써 민간인 한 명이 참수되었고 수천명의 예비 희생자들이 죽음의 땅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의식과 이성에 의해 무의식이 통제되는 ‘사람다운’ 사회를 우리는 언제까지 미뤄 두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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