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귀여움을 간직한 '하늘말나리'

내게로 다가온 꽃들(67)

등록 2004.07.14 07:27수정 2004.07.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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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모든 꽃들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 꼬박 일 년을 준비합니다. 이른 봄에는 풀꽃들이 많이 피고 늦봄에는 나무의 꽃들이 많이 핍니다. 그리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덩굴식물의 꽃들이 많이 피고 가을에는 국화과의 꽃들이 어우러집니다. 그저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순서가 있는 것이죠. 이러한 순서들을 깜빡 잊고 피어나는 꽃들을 '바보꽃'이라고 합니다.

하늘말나리는 이른 봄에 이파리부터 내는 꽃으로 우산말나리라고도 하는데 기다란 줄기에 이파리가 돌려나면서 있어서 흡사 우산같이 생겨서 얻은 이름입니다. 꽃에 주근깨같은 검은 점들이 박혀있어서 마치 주근깨 투성이의 개구쟁이 얼굴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김민수
이른 봄 새싹을 내고는 여름이 되어서야 꽃을 피우는 하늘말나리, 대부분의 나리꽃 종류가 땅을 향하는데 그들은 하늘을 향합니다. 땅을 보고 있으면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에서 겸손함을 보게 되고, 하늘을 향하면 하늘을 향하는 대로 이상을 품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른 봄 중산간 도로변에 핀 꽃들을 바라보다가 하늘말나리의 새싹을 만났습니다. 흡사 얼레지의 이파리같았는데 제주에는 얼레지꽃이 자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얼레지라면 이미 꽃이 피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줄기가 올라오고 꽃몽우리가 맺히고도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이젠 꽃이 피었겠지'하며 그 자리에 가보면 그냥 그대로입니다.

김민수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림에 지쳤을 때 숲 속 한 편에 등잔불을 켜놓은 듯 여름햇살로 한결 짙어진 푸르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불과 이틀 전에만 해도 그렇게 앙다물고 있던 꽃 몽우리를 활짝 열었습니다.

"야, 정말 얼굴 구경하기 힘들다."

다른 나리꽃 종류처럼 땅을 향하지 않고 하늘을 향한 이유가 있는 것만 같습니다. 숲의 나무들도 하늘말나리가 언제 필까 이른 봄부터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향해서 피우면 그 예쁜 얼굴을 보지 못하니 나무들이 얼마나 서운해 할까요? 그래서 그 예쁜 얼굴, 기다리던 모든 이들에게 고루고루 보여주려고 하늘을 향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김민수
하늘말나리의 꽃말은 '순결, 변함없는 귀여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꽃말 가운데 '변함없는 귀여움'이 더 좋습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모습은 흡사 '말괄량이 삐삐'를 보는 듯 했거든요. 좌충우돌,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어른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말괄량이 삐삐가 밉지 않았습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은 두 측면이 있습니다. 그 두 측면 중에서 긍정적인 측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민수
동풍(冬風)이 잦아들기 전
동토(冬土)가 봄을 잉태하고 있던 그 날
긴 겨울을 끝내고 싶어 싹을 내었다.
푸른 싹,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는 표식이었다.
그리고
봄의 들녘에서
너는 침묵하고 있었다.
봄의 향연이 끝나갈 무렵부터
너는 다시 기지개를 피며
아주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이파리들도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여 너를 바라본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툭!'
나뭇잎에서 떨어진 이슬 한 방울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졸린 눈을 비비고 피어난
변함 없이 귀여운 하늘말나리.
<자작시-하늘말나리>


김민수
하늘말나리는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참으로 오랜 시간을 침묵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이어질 침묵이 아니었고, 정지된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서 계속되는 생명의 몸부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니 정중동의 삶이죠. 정중동의 삶, 저는 이것을 느릿느릿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으름으로서가 아닌 느릿느릿, 빨리빨리를 외치며 달려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돌아볼 틈도 없이 경쟁의 대열에서 뛰어가는 현대인들이 한 번 쯤을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보아야 할 꽃입니다.

김민수
꽃을 바라보는 사람.
시간이 많아서, 여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원래 우리들의 삶의 속도라는 것이 꽃도 바라보고, 나무도 바라보고, 들풀도 바라보면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속도였습니다. 그런데 컨베이어시스템화 된 사회구조는 이 모든 것들을 사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 속도로 살아도, 숨차게 달려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은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족적을 남기지 않아도 제 속도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세상은 더 행복해 질 것 같습니다.

김민수
빠름의 대열에 가세해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꽃들, 그 대열에서 이탈하니 보이기 시작했던 꽃들은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귀여운 모습으로 서있었습니다. 그들을 만나자 행복이라는 것, 삶이란 것의 맛을 조금씩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빠름의 대열에서 상했던 마음들도 치유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빠름의 대열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도 얻게 되었습니다. 평생지기 변하지 않을 좋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곧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 '어디 갔다 왔다'는 연례행사가 아닌 영혼의 쉼을 위한 휴가계획을 위해서 서점에 가서 식물도감을 한 권 사는 것도 좋은 일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눈길을 주려고만 하면 우리와 눈맞춤 해 줄 꽃들이 지천에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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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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