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벌리고 들어갔다, 입 다물고 나온다!

[답사기] 청량하여라! 천년 고찰 경북 봉화 '청량사'

등록 2004.07.15 16:03수정 2004.07.2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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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한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사 전경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한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사 전경 ⓒ 장권호

아름답고 고운 것 보면
당신 생각납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

김용택의 <내 사랑> 중에서



소백산맥 청량산 연화봉 기슭, 이제 막 벙그는 연꽃 모양의 열두 봉우리 사이에 꼭꼭 숨은 천년 고찰 청량사. 흔히 사람들은 청량산을 '입 벌리고 들어갔다가 입 다물고 나온다'고 말한다. 청량산의 수려한 경치에 놀라 입 벌리고 들어갔다가, 나올 적엔 세상에 알려지는 게 두려워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다고 해서 유래한 말이다.

경상북도 최북단 봉화군 청량산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예전에도 몇 번이나 청량사 답사를 시도하다가 엄두가 나지 않아 번번이 포기하고 말았는데, 마침 <광주교사불자회>가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사찰 탐방에 어렵사리 동행할 수 있었다.

토요일 오후 2시 30분 비엔날레 주차장을 출발한 버스는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4시간여를 달려 중앙고속도로 안동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에서 이른 저녁을 들고 바로 출발한 일행은 이내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코스로 알려진 35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이제 막 물오르기 시작한 어린 모들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세상의 어떤 꽃보다 싱싱하다.

저 날것의 어두운 밤길을 걸어

a 유리보전 앞 5층 석탑과 범종각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금탑봉의 자태

유리보전 앞 5층 석탑과 범종각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금탑봉의 자태 ⓒ 장권호

오른쪽으로 낙동강 최상류인 명호강과 청량산 자락이 차창 너머로 아스라이 들어온다. 한눈을 팔 수 없을 만큼 빼어난 35번 국도의 아름다운 강변 풍경이 이어진다. 머나먼 여정이 이제 막바지에 이른 셈이다. 도립공원 청량산 매표소를 지나 공사 중인 집단 상가 지구에 도착했을 땐 6월의 긴 해가 완전히 졌다.


차에서 내려 내청량사 진입로인 육모정까지 어두운 산길을 걷기로 한다.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산 사이로 이어지는 산길은 불빛 하나 없는 칠흑이다. 어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준비한 랜턴을 끄고 걷는다. 불빛 하나 없는 '날것의 어둠 속'을 이렇게 걸어 본 적이 실로 얼마 만인지. 나직한 목소리로 도란거리며 어두운 밤길을 걷는 이 느낌이 참 좋다.

가쁜 숨을 내쉬며 1 시간여만에 도착한 청량사의 밤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총총한 별 밭이었다. 지현 주지 스님의 따뜻한 응대를 받고 심검당 숙소로 안내 받아 잠자리에 든 것이 열 한시, 기나 긴 여정의 하루였다.


새벽은 그렇게 찾아오고

a 나무 특유의 따뜻한 질감으로 온유한 인상을 주는 심검당 내부 소형 나무불상

나무 특유의 따뜻한 질감으로 온유한 인상을 주는 심검당 내부 소형 나무불상 ⓒ 장권호

새벽 예불을 알리는 도량석 소리에 잠을 깨보니 네시가 채 못됐다.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문을 나선다. 세상의 첫 새벽 같은 산사의 정갈한 미명이다. 체감 온도는 초가을 서늘한 날씨다. 하늘은 보랏빛을 띤 채, 별은 어제 밤보다 더 맑고 가깝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야간 모드에 맞춰 몇 컷을 시도해보았으나 여의치 않다. 좀 더 기다리면서 경내를 둘러보기로 한다.

청량사는 가람을 앉히기엔 여러 가지로 어려운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무엇보다 절대 공간이 여유롭지 못해 건물 배치가 어렵다. 이런 지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절한 간격과 높이로 석축을 쌓아 안심당과 범종루 그리고 유리보전과 심검당 등의 당우를 제 자리에 앉힌 빼어난 안목과 조촐한 불사가 돋보인다.

a 바람이 소리를 만나는 공간 안심당의 풍경소리

바람이 소리를 만나는 공간 안심당의 풍경소리 ⓒ 장권호

사찰측의 섬세한 기획력은 안심당(安心堂)에서 빛을 발하는데,‘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란 멋진 안내판을 단 이 건물은 절 집을 찾는 이들을 위한 찻집으로 웬만한 카페가 부럽지 않다. 또한 입구인 범종각 부근에서부터 촘촘하게 침목을 깔아 분위기 있는 나무계단을 만들어 여느 사찰보다 멋진 진입로를 연출했다. 물이 없는 청량사 진입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와를 이용해 만든 인공 수로로 물을 흐르게 한 발상은 정말 놀랍다.

지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법고에 이어 범종과 목어 운판이 차례로 울리면서 새벽 예불이 끝자락에 이르렀나 보다. 새들이 가장 예쁘게 노래한다는 새벽 다섯시. 유리보전 앞 오층석탑에서 바라보는 청량사 산세는 깊고 도도하다. 금탑봉과 축융봉 그리고 연화봉에 둘러 쌓인 청량사의 수려한 산세가 비로소 한눈에 조감된다. 청량산 열두봉 벙그는 연꽃잎에 둘러 쌓인 청량사의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첩첩산중 미타불(彌陀佛)이라"

a 가파른 경사와 비좁은 공간을 잘 활용한, 조촐한 불사가 돋보이는 청량사 공간배치

가파른 경사와 비좁은 공간을 잘 활용한, 조촐한 불사가 돋보이는 청량사 공간배치 ⓒ 장권호

새벽 예불을 마친 선생님들과 함께 이 교수님 안내로 1 시간여가 소요되는 자소봉 등산에 오른다. 해발 840M의 자소봉 정상에서 바라본 전망은 동서남북 거칠 게 없다. 북으로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능선과 남동쪽 주왕산까지 겹겹한 산세가 아스라히 밀려온다. 안내를 맡으신 이교수님, 자소봉 조망을 한 마디로 정리하신다.

“첩첩 산중 미타불(彌陀佛)이라.”

응진전(應眞殿)을 향해 하산길을 서두른다. 응진전 가는 길목, 어풍대(御風臺)에서 바라보는 청량사 조망에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어풍대(御風臺)에서 잠깐 땀을 식히고 나면 이내 곧 응진전(應眞殿)이다. ‘진리에 응한다’는 뜻을 지닌 응진전은 석가모니불의 제자 중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 중에서 상수제자(上首弟子) 16명을 모신 불전으로 한 마디로 ‘지혜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다.

a 자소봉 정상에서 바라 본 광활한 조망, 동서남북으로 막힘이 없다

자소봉 정상에서 바라 본 광활한 조망, 동서남북으로 막힘이 없다 ⓒ 장권호

또한 응진전은 고려 왕가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체취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정략 결혼에 의해 머나먼 이국 땅으로 시집 온 노국공주는, 후일 조국 원나라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주정책을 폈던 남편 공민왕을 도운 비운의 주인공이다.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략 때 공민왕과 함께 머나먼 청량사까지 피난길에 나섰던 그 무렵, 그녀는 개인적으로 결혼 11년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해 감내하기 힘든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한다.

축융봉에서 금탑봉과 연화봉으로 이어지는 유리보전 앞 조망이 숨막히도록 수려한 경관이라면 응진전 앞 조망은 넉넉한 육산의 포근함으로 사람을 안온하게 감싸주며 위로해주는 경관이다. 원나라에도 고려에도 속하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 생애를 마친 비운의 왕비 노국공주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안온한 산세가 참· 좋·다·

a 세상과 사람에 힘들어 질 때, 안온한 산세로 사람을 안아 주는 응진전 조망

세상과 사람에 힘들어 질 때, 안온한 산세로 사람을 안아 주는 응진전 조망 ⓒ 장권호

여행의 마무리

폐사나 다름없던 청량사를 오늘의 청량사로 만들어 낸 것은 직접 경운기를 몰고 마을을 찾아다니며 포교를 마다하지 않았던 지현 스님의 노력이다. 조심스럽게 법문을 청했을 때 스님은 '받는 불교에서 베푸는 불교로' 짧은 한 마디로 정리하신다.

스님은 사찰 음악회를 처음으로 기획하여 산사음악회의 붐을 일으키게도 했다. 오는 7월부터는 산사체험(Temple-Stay)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모든 이들에게 청량사의 문호를 열고 환영할 것이라 했다.

막힘이 없다. 그래서 천년 고찰 청량사가 오늘에도 더욱 아름다운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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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사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2년째 광주교사신문 12면에 주제가 있는 여행 꼭지를 맡아 집필하고 있다. 또한 광주과학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학교도서관 운동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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