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01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7.19 09:33수정 2004.07.1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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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였다. 연병장 침투를 맡은 은 장수는 벌써 시파르 외곽으로 들어서 있었다. 인가를 가로질러 간다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지만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는 벌판 쪽으로 다시 좀더 방향을 틀었다.

십리쯤 에돌아왔을 때 저만치 연병장이 보였다. 군사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동안 기병들이 번갈아가며 연병장 앞을 달리곤 했는데, 오늘은 그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어서 빨리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은 장수는 다시 보폭을 당겼다. 연병장 정문이 2백 보쯤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보병은 여기서 대기하고 기병만 날 따르라."

기병들은 천천히 걸어서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훈련을 받던 군사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간의 노력이 헛된 일은 아니었던지 말무리를 보자마자 그들은 훈련도 멈추고 담장으로 우루루 몰려나왔다. 오늘도 말 구경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 동안 별난 구경이라 싶었겠지. 조랑말이나 당나귀만 봐오던 터수에 다리가 쭉쭉 뻗은 큰 말들이 한꺼번에 먼지를 일으키고 달리곤 했으니 신기하기도 했
을 터….'

은 장수는 입속으로 그런 생각을 곱씹으면서 곧장 정문 안으로 통과해 들어갔다. 비로소 연병장의 군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담장까지 나온 군사들도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가 막대기를 되잡기도 했다. 이제야 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오늘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수십의 말이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백의 말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것은 침투다!

한 교관용병이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그는 소리를 치면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군사들을 한군데로 모아들였다. 그때 은 장수가 지체 없이 선전포고를 했다.


"우리 군사는 너희들을 치려고 왔다! 순순히 항복하라! 그러면 모두 살려줄 테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원 몰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두두가 그 말을 통역했다. 자기의 천리마에 갑옷까지 입은 녀석은 그 애송이 얼굴에도 불구하고 의젓해보였다. 자기도 따라가게 해달라고, 함께 싸울 수 있다고 어떻게나 보채는지 마지못해 합류시켜줬던 것인데 역시 잘한 일이라 싶었다.


두두의 말을 듣고 교관이 뭐라고 꽥꽥 소리를 쳤고 그러자 군사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우리가 속임수를 쓴다, 무장을 하라고 교관이 자기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두가 은 장수에게 보고했다. 무장을 하라고 했으면 무기를 들고 나서라는 뜻이다. 무기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병들이 그곳에 가기 전에 포위해야 한다. 은 장수는 기병들에게 급히 명령을 내렸다.

"저들을 포위하라!"

기병들이 달려 나갈 때 그는 또 창을 높이 쳐들었다. 밖에서 대기한 보병들도 동시에 출격하라는 신호였다.

적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수천의 군사가 우루루 몰려오고 말을 탄 기병들은 부채 살처럼 흩어져서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뒷걸음질을 쳤고, 몇몇 적병은 들고 있던 막대기까지 내던지고 병영건물 쪽으로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그때 은 장수가 다시 한번 통고했다.

"어서 항복하라! 열을 셀 때까지 항복하면 모두 살려준다!"

두두가 막 그 통역을 끝낸 순간, 병영건물 안에서 뭔가 쉭쉭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촉이 굵은 화살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공격수들은 그 건물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은 장수는 화가 났다. 그러나 화만 내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큼직한 화살들이 쉴 새도 없이 날아오는 통에 벌써 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악!"

그때 두두가 비명을 질렀다. 하필이면 그 굵은 화살이 가장 여린 두두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화살, 불화살 모두 공격하라! 저 건물을 불태워라!"

은 장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횃불잡이가 재빨리 앞으로 나왔고, 불화살 조가 급히 불을 붙여 화살을 날려댔다. 그러나 건물의 문은 굳게 닫혀있고 창은 띄엄띄엄 뚫려 있어 그 속으로 화살을 쏘아 넣기가 수월치 않았다.

"뭣들 하는가? 집중적으로 쏘아 넣어라!"

은 장수가 불컥거리는 사이에도 화살이 계속해서 날아와 아군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은 장수가 작전을 바꾸어 명령했다.

"기병은 말에서 내려라! 연병장 군사들 뒤로 은신해서 그들을 화살 받이로 이용하라!"
기병들이 말을 앞세우고 포위 적병들 곁으로 다가들자 은 장수가 다시 재우쳤다.

"전부 다 건물로 밀어붙여라! 모두 그 속으로 처넣어라!"

그러나 화살은 그들 군사가 아닌 이쪽 기병과 말에게로만 날아왔다. 어느 사이 말 두 마리가 쓰러졌다. 말을 방패삼아 적군을 몰고 가던 기병들은 그대로 맨몸이 노출 되었고 적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기병 한명도 쓰러졌다.

"부상자는 즉시 후방으로 옮기고, 다른 기병은 모두 말에 오르라!"

그리고 은 장수는 보병들에게 명령했다.

"모든 보병은 기병을 엄호하라!"

보병들은 기병들 앞으로 달려가 창을 높이 들어 방패 막을 세웠다. 적들로부터 기병들의 노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시 은 장수가 소리쳤다.

"가운데 두 개의 창구멍이다. 기병은 그 창구멍으로 집중 공략하라!"

다른 데는 다 막혀있으니 화살이 빗발쳐오는 그 통로에라도 맞받아쳐야 했다. 기병들은 보병들이 쳐든 그 창 사이로 다시 화살을 쏘아댔다. 적중한 화살보다 벽을 맞고 떨어지는 화살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기병들은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고, 그것은 상대방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한동안은 쌍방의 화살들이 서로 공중전을 벌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적의 공격이 뜸해졌다. 은 장수는 곧 다음 지시를 내렸다.

"이제 불화살을 쏘아 넣어라! 그리고 박격기도 진격하라!"

박격기 석대가 출격을 개시했다. 한대마다 보병 수십 명이 들러붙어 벽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한대는 문을 향해, 두 대는 벽을 향했고 먼저 부서져나간 것은 문짝이었다. 한쪽 벽도 구멍이 뚫리자 은 장수가 그 건물을 향해 폭풍처럼 달려가며 소리쳤다.

"전원 돌격하라!"

그는 화가 났고 그 화가 방망이처럼 머리꼭지로 치솟았다. 자신들은 여태껏 독안의 쥐들로부터 당한 꼴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 안에도 군사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은 했다. 하지만 무장한 군사들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들로부터 수많은 병사와 말이 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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