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인출기가 카드를 먹는다고요?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 분투기(12)

등록 2004.07.17 10:08수정 2005.08.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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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인창구의 현금인출기들. 이런 무인창구는 계속 늘어나지만 정작  이러한 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인간적인 인터페이스 구축은 아직 요원한 것 처럼 보인다.

무인창구의 현금인출기들. 이런 무인창구는 계속 늘어나지만 정작 이러한 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인간적인 인터페이스 구축은 아직 요원한 것 처럼 보인다. ⓒ 김정은

"얘, 잠시 좀 나와 봐라."


퇴근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PC 앞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몹시 다급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갔더니 모 홈쇼핑에서 방송하고 있는 상품을 사시기 위해 나를 부른 것이었다. 며칠 전 오후에 방영했던 물건인데 내가 없어서 주문을 못해 아쉬워 하다가 똑같은 물건을 판매하는 방송이 내가 있는 저녁에 나오니 이 틈에 주문하려 하신 것이다.

주문을 하고 나서 난 어머니에게 농조로 말했다.

"어머니, 방송보다가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주문하시라고 카드 드린 지가 언제인데 주문을 못하시나이까? 전화 있겠다, 카드 있겠다. 건강한 두 손 있겠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러자 어머니가 약간 화난 듯 말씀하셨다.

"아예 에미를 놀려라. 나쁜 것 같으니."

내가 농담조로 얘기했지만 어머니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자동 주문시스템

어머니는 물론 주문을 하려고 카드를 들고 전화통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푼이라도 더 아끼려고 자동주문시스템을 이용한게 탈이었다.

홈쇼핑 자동주문 시스템을 사용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그 불불명한 안내기계음과 끊임없이 눌러라 외쳐되는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상품코드번호 등등의 안내에 쉴 새없이 전화기 번호판을 눌러대다보면 헷갈려서 잘못 누를 때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어김없이 인정머리없는 에러메시지가 뜨고 다시 전화하라는 매정한 소리가 들리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이러한 허무함을 우리 어머니가 겪으신거였다. 그 후부터 어머니는 홈쇼핑의 전화주문에는 손도 안대신다. 그냥 전화로 안내원과 통화해서 주문하시라 해도 자동주문으로 2000-3000원을 절약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올 때까지 주문을 안하시는 것이다.

연세에 비해 매우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어머니지만 그래도 별로 친하지 않은 물건들이 몇몇 있는데 그것은 지금 언급했던 폰뱅킹이나 자동주문시스템같은 자동전화응답시스템, 그리고 또 한가지가 바로 신용카드와 은행의 현금 인출기이다.

이상하게 어머니는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는 걸 매우 싫어하신다. 잘못하다가 신용카드를 잃어버리면 큰 일난다는 생각때문인데 그래서 그런지 꼭 카드로 구매해야 할 사정이면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아버지나 나를 데리고 가시곤 했다.


그러던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신용카드를 소지하고 다녀야할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바로 버스카드 충전이 귀찮다는 이유로 어머니께 새로 만들어드린 교통카드 겸용 신용카드가 그것이다. 기껏 만들어줬으니 버스 탈 때 사용해야겠는데 잘못해서 흘리거나 잃어버리면 어떡하나하는 걱정 때문에 밤을 새우신 우리 어머니, 결국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찾으셨는데 그 해결방법이란 바로 지갑 일정한 곳에 카드를 넣고 접착력 좋은 두꺼운 테이프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키는 방법이었다.

하긴 교통카드 외에는 쓸 일이 없으니 나름대로 고민 끝에 생각해내신 '굿 아이디어' 아닌가? 며칠 이런 방법으로 사용하다 보니 나름대로 익숙해지고 불안감이 덜 해진 것처럼 보여 어느날 나는 어머니에게 새로운 도전을 넌즈시 제안해보았다.

현금인출기가 카드를 먹으면 어떡하니?

"어머니,이제 은행 갈 때 일일이 통장하고 도장 챙기지 말고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시지 그래요?"

그랬더니 우리 어머니 단호하게 '노(NO)' 표시를 하시는 것이었다.

"지난번 어떤 사람이 현금인출기에 카드를 넣었는데 현금인출기가 카드를 먹어버려서 안나오더라. 만약 내가 현금 인출기에 카드를 넣고 잘못 눌러 카드가 안나오면 어떡하냐. 난 그게 무섭다. 그냥 속 편히 통장 이용할란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우리 어머니같은 연세 지긋한 분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우리 주위에도 내색은 안하지만 은근히 이러한 기기들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인건비 절약과 관리비 절감의 기치를 내세워 은행 무인시스템은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렸다. 세월이 흐를수록 은행 접수창구는 줄어들 것이고 그와 반비례하여 각종 기계들이 넘쳐날 것이다.

문제는 현금인출기 뿐만 아니라 공과금 자동납부기, 동전 교환기 등등 작동법도 정밀해진 각종 자동화기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이런 기기들이 사용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용자 인터페이스에는 소홀하다는 점이다.

조금만 잘못 집어넣으면 사정없이 흘러나오는 기분 나쁜 에러메시지, 복잡하고 불분명한 화면 속 안내메시지, 분명히 눌렀는데도 잘 작동하지 않는 터치스크린 등. 물론 자동화기기들이 정확하고 안전하고 빠르게 작동되느냐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인간적인 기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잘 보이고, 따라하기 쉽고 간단하며, 잘못 작동했을 때 수정이 간단한가 하는 등의 친인간적인 인터페이스 구축이다. 이런 조건들이 아날로그형 인간들을 기계 앞에 끌어드리기 위해 중요하게 고려사항 아닐까?

친인간적 인터페이스 필요

한 은행. 그날 따라 창구는 매우 붐볐고, 순서를 기다리는 번호표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한 할머니가 현금인출기 주변을 왔다갔다 하시더니 결국 포기하고 소파로 돌아가 많은 사람의 행렬이 사라질 동안 기나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문득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 또한 이 순간 저 할머니처럼 기나긴 시간동안 은행창구에서 기다리느라 지치지 않으셨을까? 아무리 CF 속 산사의 스님이 휴대폰으로 은행계좌 이체를 할 수 있다고 떠드는 세상이라 해도 디지털 기기가 두려운 사람들에게 그러한 모습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쉴 새없이 최신 디지털 기기의 편리함과 기능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작 디지털 기기가 두려운 사람들까지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작고 세심한 배려, 그것이야말로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디지털 세상을 가꾸어나가는 과제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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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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