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03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7.21 10:35수정 2004.07.2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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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부대가 군주의 성 앞에 도착했을 때는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성을 지키는 문지기도 없었다. 성 안엔 연못공사가 한창이라 흙을 져 나르는 인부들만 성문 안팎을 들락거렸다. 군주도 출타 중이었다. 연못 치장에 쓸 돌을 직접 선택하기 위해 자그로스 산쪽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에인은 제법 갖추어진 도시국가 하나를 싱겁게 접수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보병들은 성 문과 인부들을 감시하고 기병은 날 따르라!"

에인이 먼저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성 건물은 연못 안쪽에 있었다. 건물 정면에는 큰 돌기둥이 나란히 세워졌고 그 위로 청동 지붕을 올린 것이 크진 않지만 화려해보였다. 또 그 둘레로는 잘 가꾸어진 정원을 배치한 것이 군주의 꾸밈새 취향이 엿보이기도 했다. 에인이 지시를 내렸다.

"제후와 강 장수는 안으로 들어가 성 안을 평정하시오."

기병들 백이 모두 말에서 내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이 소란했을 텐데도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놀라서 소리치거나 우왕좌왕 뛰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태 외부침범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안으로 유인해 들이려는 위장술인지도 몰랐다. 강 장수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안에 근위병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지는 않을 것이다. 숫자가 많든 적든 그들이 저항하기 전에는 먼저 무기를 사용하지 말라."


가능하면 피를 보지 말라는 게 에인의 지침이었다. 그 이유를 '이 도시는 아직 국신이 없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천신을 세워야 한다, 천신도 이곳 주민을 어진 백성으로 받아들이시겠다고 내게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살육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 장수가 회랑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군주의 아이들이 분주하게 성 안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이놈들!"

강 장수가 호통을 치자 아이들은 비로소 멈추었다. 그리고 두릿두릿 살펴본 연후에야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아이들을 따라가라. 거기에 군주의 아내가 있을 것이다."

역시 아이들은 자기 엄마한테로 달려갔다. 강 장수가 도착해서 커튼을 걷어보니 군주의 아내는 의자에 앉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시종에 의해 머리단장을 하던 중이었고 아이들과 시종은 그녀 뒤에 서 있었다.

"군사 다섯이서 이 방 앞을 지켜라."
"아이들도 묶어야 할까요?"

부하가 물었다.

"아무도 묶지 마라. 이 방안에서는 자유로이 움직이도록 하되, 바깥출입만 통제하라."

그는 그 지시를 남긴 뒤 연회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의 여주인이 그렇게 연금을 당했는데도 실내는 여태도 조용했다. 놀라서 튀어나오는 무리도 없었다. 침략을 당하고도 어떻게 이런 평온이 지속되는 건지 그는 잠깐 의아했다.

'그래, 역대 장수들은 말해왔다. 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끼어드는 법이라고, 그렇다면 이곳은 군주의 부주의? 보초도 군사도 세우지 않고 출행한 그 방심?'

그때 제후가 나직이 속삭였다.

"먼저 뒤채로 가지요. 근위병들은 그들의 식당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 용병들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들 숫자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기병 50이면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성안에는 근위병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을 지키는 대신 식당에 몰려 있었다. 더욱이 그 식당은 성 뒤편이어서 성 앞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란은 잘 들리지 않았다. 성문조차 인부들의 출입에 맡긴 채 모두 식당에 모여 있다는 것은 그들끼리 뭔가를 즐기고 있다는 증거며, 그렇게 주도한 것은 환족 용병이었던 것이다.

"50은 날 따르고 나머지는 여기를 감시하라."

강 장수는 기병 50을 이끌고 곧장 뒤채로 향해갔다. 근위병이 머무는 뒤채는 완전 별채 같았고 식당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강 장수가 문을 열었다. 근위병들은 모두 음식상 앞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면서 서로 떠들어내는 중이었고 술들도 꽤나 마셨는지 얼굴들도 벌겋게 익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제후는 얼른 그 내막을 말하고 싶었다.

'저들이 먹는 것은 오리고기다, 두수가 강에서 잡아 이곳 용병들에게 넘겼으며 용병들은 또 그걸 미끼로 성안 근위병들을 저렇게 잡아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입을 꾹 다물었고, 대신 강 장수가 조용히 지시했다.

"한 사람씩 묶어서 여기에 감금하라."

모두 서른 두 명이었다. 근위병들은 저항을 하려고 했으나 그들 가까이는 무기도 없었다. 또 대장인 듯한 털보 남자는 일어서다 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술에 너무 취해버린 것이다.

큰 소동도 없이 전원 모두가 간단히 묶였다. 환족 용병도 함께였다. 아직은 군주를 잡지 못했고 또 묶인 근위병들에게 의심을 주지 않기 위해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강 장수가 그 무리를 돌아보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공이 크오. 시간이 되면 조치를 취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고 있으시오."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환족용병들 뿐일 것이었다. 역시 알아들었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 장수는 안심하고 등을 돌렸다.

"30은 여길 지키고 나머지는 날 따르라."

그들은 다음 차례로 성안 주방으로 향했다. 시종들은 모두 거기 몰려 있었는지 주방 안은 그렇게 분주할 수가 없었다. 음식을 만들거나 과일을 옮기거나 술을 거르는 사람, 그러니까 그들은 잔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군주가 돌아오면 연회를 열기로 약정이 된 모양이었다.

"각자 그 자리에 있게 하고 출입만 통제하라."

강 장수가 그런 지시를 내리고 있는데도 놀란 시종들은 벌써 그릇을 떨어뜨리거나 뒷걸음질을 쳤다. 강 장수가 제후에게 일렀다.

"저들을 안심시키시오. 저항만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것이니 모두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된다고 이르시오."

제후가 시종들에게 설명을 하는 사이 강 장수는 등을 돌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접수해야 할 곳이 있었다. 군주의 집무실이었다. 강 장수는 부하들을 남겨놓고 혼자서 그 집무실로 향했다.

군주의 집무실은 회랑 안쪽이었고 그 문은 열려 있었다. 강 장수는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아무도 없었고, 주인이 부재중임에도 집무실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강 장수는 찬찬히 실내를 돌아보았다. 벽은 채색벽돌로 꾸며졌고 권좌는 그 중앙에 놓여 있었다. 한쪽 옆에는 의자들도 가지런히 배치해둔 것이 꽤 실속이 있고 아담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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