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05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7.23 10:39수정 2004.07.2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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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에 도착해 보폭을 줄일 때 제후가 알려왔다.


"강에 큰 나루가 있고 군주는 그쪽으로 건널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은둔했던 곳에서 얼마나 떨어진 나루요?"
"오십여 리쯤 아래가 되겠습니다."
"불과 오십여 리 아래에 큰 나루가 있었다....."

강 장수는 뜨끔했다. 강물 50여리는 그렇게 긴 거리가 아니다. 그것도 모르고 위에서 뗏목을 만들고 조석을 지어먹었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만약 낯선 군사들이 거기서 열흘이 넘도록 주둔했던 걸 알았다면 오늘의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제후가 주변에 대한 설명을 보탰다.

"이 나루 쪽은 강이 구불구불 휘어져 있고 또 휘어진 틈 사이로 갈대밭도 많아, 숨어서 지키기에도 용이할 것입니다."
"그래요? 우선 현장으로 앞서시오."

강 장수의 지시에 제후가 다시 앞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한 나루는 시파르 도심지에서 70여 리쯤 떨어져 있는 티그리스 강이었다. 그러나 강에 도착해보니 그 나루터엔 사람도 배도 없었다.

"저길 보십시오. 뗏목입니다."


그때 부하가 강 건너를 가리켰다. 건너편 좀 아래쪽으로 뗏목 두 척이 정박되어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군주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고 그러면 군주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강 장수는 얼른 주위를 살폈다. 나루 위쪽은 나무들이 있고 아래쪽에는 갈대들이 우거져 있었다.

"이제부터 아래위로 분산해서 매복한다. 사람도 말도 형체가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라. 그리고 군주 일행이 강 건너에 나타나면 곧 말 입에 수건부터 묶어라."


기병들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제후는 무슨 말인가 해서 장 장수를 쳐다보았다. 장수는 제후의 눈길을 일별하고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군주가 강을 건너오기 전에는 어떤 낌새도 알아채지 못해야 한다. 만약 도강 중 그가 우리의 말을 보거나 그 소리를 들으면 곧장 강물을 타고 아래로 도주할 수도 있다. 이점 명심하라."

그의 말이 끝나자 기병들은 비로소 자기 목 속의 수건부터 확인했다. 기병들에게 목수건을 지참시킨 것은 강 장수였다. 지난겨울, 딜문의 야밤 정벌 때 그들은 말 울음소리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적이 있었다. 말들은 가만히 서 있을 때 누가 불시에 건드리면 히힝, 하고 소리를 지르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쯤 지났다. 강 장수 일행들은 말도 사람들도 모두 땅바닥에 주저앉아 강 저쪽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군주 일행이 나타났다. 군주는 나귀를 타고 바쁘게 강변으로 내려섰고 수레와 일꾼들은 조금 간격을 두고 나타나 역시 뗏목 쪽으로 향했다. 군주의 태도가 유유자적해 보이는 것이 아직 그 어떤 소식도 접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강 장수는 목덜미 안에서 목수건을 풀어낸 후 그것으로 말의 긴 주둥이를 묶었다. 몇 차례 예행연습이 있었던지라 말들은 순순히 응했다. 그때 군주가 나귀에서 내려 먼저 뗏목에 올랐고 시종이 나귀를 끌고 그 뒤를 따랐다.

"뒤의 뗏목까지 기다릴 것 없다. 군주가 이쪽 나루에 도착해 나귀에 오르면 그 즉시 출동한다."

강 장수가 입을 가리고 말했다. 바람이 직향일 때는 강은 작은 소리도 곧바로 실어가기 때문이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뗏목을 주시했다. 장정 둘이서 부지런히 상앗대질을 하는데도 뗏목은 너무도 더디게 다가왔다.

마침내 군주의 뗏목이 강가에 닿았다. 기병들은 말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앉아만 있어서 굼뜨긴 했으나 그래도 말들은 벌떡벌떡 일어나 주었다. 강 장수는 다시 나루 쪽을 살폈다. 군주가 막 나귀에 오르는 중이었다.

"출발!"

강 장수는 말 입에 묶었던 수건을 휙 풀어내며 그대로 앞질러 나갔다. 기병들도 그 뒤를 따랐다. 강 장수의 기병들이 단숨에 달려가 군주의 말 앞을 가로막고 섰다. 군주는 놀라서 뒤로 물러서면서도 얼른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때 아래쪽에 매복했던 제후와 기병들까지 달려와 합세를 했다.

군주는 재갈이 물린 자기의 집사를 보고서야 비로소 상황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나귀를 돌려 달아나 보려고 급히 채찍을 갈겼으나 이미 그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었다.

"끌어내릴 것 없다. 그대로 묶어라."

강 장수가 명령했다. 기병이 말에 탄 채 그를 묶는 사이에도 군주는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말소리로 보아 적은 셈족이나 아슈르, 아라비아 쪽도 아니었다. 복장 또한 한번도 본바가 없는 갑옷이었고 게다가 전원이 말을 타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로만 듣던 그 북방 침략자들인가? 그러나 그들이 왜 여기서? 그러자 그 순간 자기 성도 이미 침략을 당했다는 생각이 회오리처럼 스쳐갔다.

'나의 성이, 그토록 공들여 단장했던 그 성이, 아라타나 자그로스로 몇 차례나 왕래하며 돌과 금속을 사들였고 지붕까지 멋진 청동으로 올렸는데 겨우 십년도 살지 못하고 빼앗겼단 말인가?'

"안돼! 안돼!"

군주가 갑자기 반항을 했다. 묶인 온 몸을 흔들어대기까지 해서 자칫하면 나귀 등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강 장수가 그를 바라보며 묵직한 소리로 명령했다.

"재갈을 물리고 그 몸도 더 단단히 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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