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하러 갔다가 강연을 듣고 왔습니다

'달길'이란 덧 이름도 얻었습니다

등록 2004.07.22 12:17수정 2004.07.2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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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문고 홍보실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인천에 분점을 낼 예정인데 개장 날짜에 맞춰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올렸던 글을 묶어 지난 겨울, 책이 나왔는데 책에 관련된 사는 얘기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지난 달 ○○문고에서 어떤 '기획전'이 있었는데 거기에 내 책이 선정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 사실을 강연 요청이 왔을 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문고에서는 그런 인연으로 강연을 요청했던 모양입니다.

말 주변머리가 없어 사람들 앞에 서면 버벅거리기 일쑤인 내가 뭔 강연을 하겠는가 싶어 망설였습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더더욱 신경이 쓰였습니다.

얼마 전에 ○○방송에 출연해 '적게 벌어먹고 사는' 얘기를 주절거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이라서 큰 부담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출연했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무척 후회를 했습니다. 별로 허물없이 잘 살고 있는 척 주절거렸던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 정도였습니다.

그 어리석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비좁은 골목길을 돌다가 멀쩡하게 서 있는 벽을 들이받았습니다. 자동차 앞부분이 파손된 아주 경미한 사고였지만 내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사는 게 이러니 저러니 하다고 함부로 단정지어 말하지 말라'는 경고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아내에게 강연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두말할 것 없이 찬성했습니다. 강연료까지 나온다니 아내는 무척 좋아했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함께 가자며 소풍 떠나는 아이처럼 들떴습니다. 나 또한 부담이 됐을 뿐이지 크게 거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기분 좋아하는 아내를 보다가 강연을 나서기로 했습니다. 요즘 우리 동네 주변의 땅 투기 바람으로 인해 집 걱정하는 아내에게 위로가 될 듯 싶기도 했습니다. 결국 일방적으로 주절거리는 강연 형식보다는 강연장을 찾은 사람들과 마주 앉아 질문을 받아 얘기하는 형식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가족들을 떼 놓고 혼자 가기로 했습니다.

공주에서 인천으로 직행하는 고속버스가 있었습니다. 인천으로 향할 때마다 늘 떠오르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고향을 떠났는데 그 친구가 떠난 곳이 바로 인천이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그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재준', 그 친구는 소달구지를 타고 떠났습니다. 나는 몇 날 몇 밤을 가도 가도 다 못 간다는 그 멀다는 인천까지 어떻게 갔을까 걱정이 돼 며칠 내내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 친구는 고향을 떠나면서 내 가슴에 묵직한 뭔가를 남겨놓았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를 떠올릴 때마다 그 묵직한 덩어리가 왈칵 솟아오르곤 합니다.

부모님이 이북 출신인 그 친구의 사투리는 아주 독특했습니다. 쇠 덩어리를 '에떵어리, 변전소를 '벤잰소'라 발음했습니다. 내게 그 어떤 놀림을 당해도 다 받아 주었던 한없이 착한 친구였습니다. 이제는 인천 어딘가에서 자신을 닮은 사람 좋은 아내를 만나 알토란같은 자식새끼 낳아 잘 살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인천은 공주에서 고속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 있었습니다. 문을 연 지 이틀째 된 큰 책방은 좀 부풀려 말하자면 발 딛을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했습니다. 하지만 내 책 몇 권이 놓여져 있는 강연장은 설렁했습니다.

강연장을 찾은 몇몇 사람들과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살아가는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저녁밥을 먹기 위해 책방 주변에 있는 삼겹살 집을 찾아갔습니다. 내 책을 낸 황소걸음 정우진 대표와 일 보러 인천에 왔다가 우연히 책방에 들러 강연장을 찾았다는, '한글문화연대'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기만 선생과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이 선생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습니다.

뒷날, 인터넷을 통해 알게된 '한글문화연대'의 취지를 그대로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외국 말글의 침투로 스러져 가는 우리 말글을 가꾸며 우리 문화와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학술, 방송, 언론,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름다운 우리 말글을 가꾸어, 세계화의 공세 속에서 잃어 가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고, 더 나아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독창적인 한글 문화를 일굴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수염 기르고 계룡산에서 산다 해서, 처음에는 그렇고 그런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요, 계룡산 도사 흉내내는 인간 같쥬? 내가 수염 기르고 다니는 건 순전히 게을러서 그류, 도사하구는 전혀 상관읎유, 시골에서 살다보니 밖에 나갈 일도 벨루 없구, 집안에서 수염만 깎구 있잖니 좀 그렇고, 그냥 기르고 다니네요…."

내 첫인상에 '오해'를 했다는 이기만 선생은, 한글문화운동 뿐만 아니라 조형문화운동, 공연기획 등을 펼쳐 오고 있다는데 돈 되는 일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로 있는 그는 겉모습이 '폼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그는 우리말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얘기 도중에 내 입에서 어쩌다 '빵구'라는 말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이 선생은 '빵구'라는 내 말에 가벼운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는 '빵구'와 같은 낱말을 들으면 참지 못하는 성미라서 꼭 바로 잡아 쓰기를 바라는 말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선생은 언젠가 지하철에서 '빵구'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해서 쓰는 학생들을 쫓아 간 적이 있었다며 한글문화운동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오래 전의 얘기를 들려줬고, 요즘은 외래어 일색인 극장 이름과 영화 제목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외래어가 붙어야 국제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대중이 원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서양 문화에 병적으로 젖어있는 문학가들을 닮아보겠다고 어리석게도 내 입에 배어 있던 그 정감어린 우리말들을 없애려 노력했던 학창시절 얘기며 한글날 '우리말을 올바로 쓰자'는 방송 원고를 썼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는 얘기 등을 털어놓았습니다.

황소걸음 정 사장은 출판관계자들과 단합 대회를 간 자리에서 밤새 우리말 놀이를 했던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외래어를 쓸 때마다 쓰는 사람이 술 한 잔씩 들이키는, 정 사장이 제안한 놀이였는데 누구보다 우리말에 자신이 있다고 자부해 왔던 본인이 가장 먼저 술에 취해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 역시 그 날 밤 술을 이겨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외래어를 쓰지 않고 버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글에 대한 불쾌한 추억들을 안주 삼아 소주 한 병 반쯤을 마시고 우리는 공주 가는 막차 시간에 맞춰 삼겹살 집을 나왔습니다. 고속버스를 타러 가는 길목에 이기만 선생이 불쑥 그럽니다.

"송 성생님? 송성영? 발음하기 힘드네요."

'송성영' 이라는 내 이름 받침이 줄줄이 이응 자로 이어져 있어 발음하기 힘들다며 한문으로 '성' 자가 어떤 자냐구 물었습니다. 나는 보름달이 뜨기 이틀 전에 태어났는데 우리 아버지께서 보름달을 보고 옥편에도 없는 달 월(月)에 날 생(生) 자를 붙여 그냥 '성'자로 만들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럼 영은 한문으로 무슨 '영' 인가요?"

"길 영…."

"그럼, '달길' 어때요?"

그는 즉석에서 '성영'에 대한 덧 이름('덧 이름'은 다른 이름, 혹은 흔히 말하는 '호'도 될 수 있습니다)을 '달길'로 지어주었습니다.

'달길', 기분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달은 뜨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좋은 사람 만나, 소주 몇 잔에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고 거기에 한글 이름까지 얻었으니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인천에 왔던 본래 목적이 무엇이었나, 외래어보다는 재미있고 예쁜 한글을 쓰고자 하는 이 선생을 만나러 왔던가 싶을 정도로 인천에 온 목적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문득 강연하러 왔다가 우리말글 강연을 듣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껌 파는 아줌마로부터 이 선생이 사준 천 원짜리 껌을 씹으며 인천에 와서 보낸 몇 시간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세상에 허물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누군가를 가르친다고 나서는 것, 특히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단정지어 말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연장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를 다시 한번 곰곰이 되짚어 보다가 결국 나는 두둑한 강연료 봉투를 떠올리며 기분 좋아할 아내를 생각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번에는 멀쩡한 벽을 들이받을 자동차도 몰고 오지 않아 마음이 한결 편했습니다. 모처럼 만에 아이들이 원하는 맛있는 뭔가를 사 줄 행복한 궁리를 했습니다. 어렸을 때 소달구지 타고 인천으로 떠났던 친구는 까마득히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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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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