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피해 떠나는 여름숲 기행

국립공원 내장산 지구 남창계곡을 찾아

등록 2004.07.22 18:05수정 2004.07.2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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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이 찾아왔다 자취도 없이 떠나버린 그 짧은 초여름을 배웅하고 나니 어느새 7월이다. 아스팔트를 녹이는 뜨거운 도시의 바람을 피해 싱그러운 바람의 감촉을 좇아 갈맷빛으로 물들어 가는 여름 숲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a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풍부한 남창계곡은 청정지역으로, 찾는 이가 드물어 호젓하기만 하다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풍부한 남창계곡은 청정지역으로, 찾는 이가 드물어 호젓하기만 하다 ⓒ 장권호

나라 안에서 여덟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내장산국립공원 자락에는 북으로 내장산 계곡과 남동으로 백양사 계곡이 둥지를 틀고 있어 사계절 내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오늘 찾아갈 입암산 남창계곡은 내장산국립공원의 남서쪽 계곡으로 내장사 계곡이나 백양사 계곡에 비해 사람들에게 덜 알려져 있어 사람의 공해에서 벗어나 여름 숲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하·염·없·이 걷기에 참 좋은 그 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창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였고 국립공원 입장료도 징수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국립공원 입장료 1600원에 주차료 4000원을 지불해야만 입장할 수 있다.

입장료 탓인지는 몰라도 매표소측에 따르면 내장산 전체 탐방객의 5%도 못 미칠 만큼 내장산 국립공원 내에서 가장 한적하고 깨끗한 계곡이라고 한다.

a 매표소에서 전남대수련원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남창계곡 초입으로, 차량 통행이 드물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좋다.

매표소에서 전남대수련원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남창계곡 초입으로, 차량 통행이 드물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좋다. ⓒ 장권호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을 빠져나와 1번 국도로 접어들면 바로 장성군 북이면이다. 북이면 사거리를 지나 1번 국도를 따라 북하면 쪽으로 10여 분을 달리면 장성군 북하면 남창계곡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숲 체험을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일정이라면 매표소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매표소에서부터 걷기를 권하고 싶다.


사실 나는 남창계곡 매표소에서 전남대수련원까지 4km에 이르는 호젓한 이 길을 숲길 못지 않게 좋아한다. 가인봉과 장자봉 사이의 넓고 아득한 계곡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이 도로는 차량 통행이 드물고 산세의 흐름이 좋아 그냥 하·염·없·이 걷기에 참 좋다. 아이들에게 찔레꽃과 층층나무와 애기똥풀을 가르쳐 준 것도 이 길이었으며, 마음 아파하는 아내와 화해한 것도 이 길 위에서였다.

시속 100km의 아찔함에서 잠시 벗어나 사람의 속도를 회복, 시속 4km의 길고 느린 호흡으로 이 길을 걸어 보라.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과 저녁놀의 아름다움에 잠시 눈길을 빼앗겨도 좋을 것이다.


a 생명이 들끓는 이 여름 숲에서는 이정표마저 시원하기만 하다.

생명이 들끓는 이 여름 숲에서는 이정표마저 시원하기만 하다. ⓒ 장권호

연두에서 청록까지 온갖 녹색의 향연

남창계곡의 본격적인 숲 탐험은 전남대수련원을 지나 새재 갈림길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여기서부터 제5 남창교가 있는 은성골 전남대 삼나무 인공 조림지까지 약 3km에 이르는 숲길이 남창계곡 숲 탐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다.

등산로라기보다는 차라리 산책로에 가까운 이 숲길은 남창계곡 숲 중에서도 가장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관찰할 수 있는 구간으로 여름 숲에서 볼 수 있는 연두에서 청록에 이르는 온갖 녹색들의 아름다움을 체감할 수 있다. 빛의 강도와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녹색의 진수를 제대로 만끽하기 위해서는 햇살이 강렬한 오후 3시 정도가 가장 좋다.

a 남창계곡에서 만난 여치 한 마리에서 생명의 외경을 본다

남창계곡에서 만난 여치 한 마리에서 생명의 외경을 본다 ⓒ 장권호

햇빛이 잘 들치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길을 따라 경쟁하듯 하늘로 뻗어 올라간 층층나무, 합다리나무, 까치박달나무, 애기단풍 서어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느티나무, 나도밤나무 등의 큰 키나무들의 잎들 위로 여름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여름 햇살이 잘게 부서져 내리는 7월의 숲은 환상 그 자체다. 선명한 잎맥과 넓고 시원한 잎을 자랑하는 나도밤나무는 이즈음이 가장 아름답다.

탐방로 초입에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도란도란 따라오는 물소리와 나뭇잎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만이 꿈결처럼 들려오는 초여름 숲길은 싱그러움 그 자체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탐방로를 오르다 보면 이내 제1 남창교와 제2 남창교 사이의 삼나무 조림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때쯤 되면 이마와 등허리에 촉촉이 땀이 배어나게 된다. 전남대학이 연습림으로 관리하고 있는 삼나무 조림 숲은 천연스러운 자연림과는 달리 제복 입은 생도들이 열병식하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a 전남대측이 연습림으로 가꾸고 있는 편백나무 숲으로 남창계곡에서는 인공림과 자연림을 함께 볼 수 있어 좋다.

전남대측이 연습림으로 가꾸고 있는 편백나무 숲으로 남창계곡에서는 인공림과 자연림을 함께 볼 수 있어 좋다. ⓒ 장권호

평일 오후라면 이 환상적 숲속 탐방길을 온전히 독차지 할 수 있다. 두어 시간 소요되는 이 숲속 길은 나무와 바람과 햇빛뿐이다.

지금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오래 전 어느 봄날, 질색하는 아내의 만류를 무릅쓰고 딸 아이와 나는 윗옷을 벗어던진 채 이 숲길을 따라 깔깔거리며 오후 한 나절을 함께 뛰논 적이 있다. 인화지에 배어든 영상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그 봄날 오후를, 딸 아이와 나는 아직도 소중한 비밀로 간직하고 있다.

숲에서 이는 서늘한 저녁 바람의 감촉

제3 남창교를 건너면 입암산성 남문과 북문으로 갈리는 세 갈래 길이 나온다. 대개 남창골을 찾는 사람들은 여기서 엉덩이를 붙이고 한숨을 돌린다. 산성골과 은성골에서 발원한 물이 이곳 세 갈래 지점에서 합쳐지는데 등산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우측 산성골로 길을 잡아 입암산성 남문으로 오른다.

a 오염원이 없어 1급수를 자랑하는 맑고 깨끗한 남창계곡 물은 장성호로 흘러 들어간다

오염원이 없어 1급수를 자랑하는 맑고 깨끗한 남창계곡 물은 장성호로 흘러 들어간다 ⓒ 장권호

좌측 은성골 쪽으로 방향을 잡아 제5 남창교를 건너면 바로 전남대 연습림인 삼나무 숲이다. 오늘 숲 체험의 종착지다. 햇빛이 잘 들고 경사가 완만하며 생태계가 양호한 울울(鬱鬱)한 삼나무숲에 그물 침대를 매달고 이제 숲 탐방이 줄 수 있는 최상의 호사를 누려볼 차례다.

하늘까지 뻗어 올라간 미끈미끈한 삼나무 숲 그늘,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과 서늘한 바람에 온전히 몸을 맡겨 본다. 숲이 주는 안온함 속에 어느새 내 몸은 한 그루 나무가 된다.

이제 먼지 이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서녘 하늘에 남아 있는 보랏빛 잔광이 그림처럼 곱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 올 때보다 아무래도 바쁘다. 햇살이 가셔버린 여름 숲은 화장기 없는 여자의 맨 얼굴처럼 정갈하기만 한데 숲에서 이는 서늘한 저녁 바람의 감촉이 욕조의 샤워보다 더 상큼하다.

a 일본이 원산지인 삼나무 인공조림 숲은 전남대측이 연습림으로 가꾸고 있다.

일본이 원산지인 삼나무 인공조림 숲은 전남대측이 연습림으로 가꾸고 있다. ⓒ 장권호

여행의 마무리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등산과는 달리 숲 탐방은 여정이 자유로워야 한다. 꼭 올라야 할 봉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건너야 할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모든 것을 맡기고,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 숲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머무른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다.

반바지 면티 차림으로 어슬렁거리기 좋은 이 여름이 다 가기 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소중한 삶을 나눌 수 있는 추억의 숲길 하나쯤 간직하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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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사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2년째 광주교사신문 12면에 주제가 있는 여행 꼭지를 맡아 집필하고 있다. 또한 광주과학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학교도서관 운동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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