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에서 바라본 까략스키김비아
북쪽으로 가고 싶어 택한 곳이 러시아였다. 냉전 시대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동토의 땅이었지만 이제 우리의 시야에 나날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는 곳. 드넓은 러시아 땅 가운데 내가 택한 여행지는 가장 극동에 위치한 캄차카 반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아름답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연해주의 중심 도시 하바롭스크까지는 불과 두 시간 반의 거리였다. 블라디보스톡이 외곽에 치우쳐 있어서 구 소련 시절, 극동 지역의 거점 도시로 개발한 곳이 하바롭스크라 했다. 하바롭스크의 저녁은 건물마다 온통 백열등의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어서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러시아에서는 형광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날, 하바롭스크 공항에서 만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바이칼 호수를 보러 서쪽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 하바롭스크에서 바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시작된다. 다음 기회엔 이 길을 따라서 바이칼까지 가리라 생각했다.
우리 일행은 그와는 정 반대편, 동쪽의 캄차카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캄차카의 중심 도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까지는 약 두 시간이 걸렸다. 로스트월드 투어의 통역 아냐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이번 여행은 난생 처음으로 떠나는 패키지여행이었다. 일행은 가족 세 팀, 60대인 네 사람이 한 팀, 나를 포함해 혼자 온 세 사람과 가이드까지 총 열아홉 명이었다. 늘 배낭을 꾸려 혼자 나섰던 걸음이지만 이번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장기 여행은 자신이 없었고 트레킹 위주의 일정이라서 패키지의 편리함을 택했다. 여행 내내 나는 이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최근에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캄차카 반도는 백여 개의 화산이 솟아 있고 그 가운데 이십여 개는 활화산이다.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삼천미터 급의 산들, 곳곳에서 솟아나는 간헐천, 연어가 회귀하는 아름다운 강, 야생 동물, 그리고 바다. 자연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우리나라도 아기자기하게 아름다운 자연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자연에 늘 매혹되었다. 캄차카는 그런 곳이었다. 캐나다 쪽과 느낌이 약간은 비슷했다. 아마 알래스카도 이와 경관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
그러나 낙후된 경제 사정, 러시아에서도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지역에 속하는 이유 때문에 도시는 회색빛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나즈막한 언덕들이 이어지는 항구 도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는 잘 가꾸기만 하면 무척 예쁜 도시였을 테지만, 도시 전체가 보수를 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어 안타까울 만큼 퇴락한 모습이었다.
동서 냉전 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역할을 했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군대가 철수하고, 인구도 계속 줄기 때문에 경제 사정이 나아질 전망은 별로 없다고 한다. 반도 전체에 사십만 명 정도가 산다고 하는데 주 산업은 어업뿐이며, 천연 자원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아냐의 말에 따르면 여름에는 도시 전체에 난방이 되지 않아서 찬물로 샤워해야 할 정도라고.
중앙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레닌 동상이 구 소련 시절의 잔영을 보여준다. 러시아 땅의 레닌 동상이 대부분 철거되었다고 들었기에 아직 남아 있는 까닭을 물어 보았다. 사람들이 그냥 두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리 되었다 한다. 세상 모든 독재자들의 심리, 자기의 동상을 곳곳에 세워두는 그 마음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토록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우리가 흔적을 남겨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사람들의 마음 속 뿐일 진데.
중앙 광장을 지나면 러시아인들의 이주를 기념하는 공원이 나타난다. 이곳에 러시아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캄차카 대탐험이 시작된 18세기 말부터이다.
캄차카 반도의 원주민인 고시베리아 인종에 속하는 에벤키족은 북부에 가야 만날 수 있다. 순록을 키우기 때문에 초지가 필요해 북쪽 툰드라 지대에 산다고 한다. 에벤키족 역시 몽골리안 계통일 것이기에 관심이 갔다. 물어보니, 에벤키족 문화의 중심지는 에쏘. 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열 시간이나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낙원처럼 아름다운 곳이라고. 속으로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바친스키 트레킹
트레킹을 위해 아바챠 화산 지대로 가는 길, 도로 옆 빈 들판은 노란 색, 분홍색의 갖가지 화려한 야생화들로 그득해서 눈길을 끈다. 우리는 탱크처럼 큰 바퀴가 달린 특수 차량을 타고 갔는데 이유가 있었다. 본격적인 화산 지대에 접어들자 길이 아니라 옛날 강이 흘렀던 자리 즉 물이 마른 강을 따라 갔기 때문이다. 아냐 말고도 산악 가이드, 요리사 등 여러 명이 동행했다.
두 시간 만에 눈 덮인 까략스키와 아바친스키가 바라보이는 넓은 평원 지대에 도착했다. 통나무집 한 채와 작은 오두막 셋이 전부였다. 넓게 펼쳐진 초원에는 야생화가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공기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 청량한 공기는 허파 가득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만년설로 뒤덮인 산들의 웅장한 자태도 내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