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마곡추갑사', 한여름의 마곡사도 좋더라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아늑한 절집, 공주 마곡사

등록 2004.07.26 14:44수정 2004.07.26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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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곡사를 향해 걸어가는 스님의 모습

마곡사를 향해 걸어가는 스님의 모습 ⓒ 이인우

백제의 고도 공주에는 널리 알려진 유명 사찰들이 많다. 고등학교 교재에도 실렸던 이상보의 수필 <갑사로 가는길>로 유명한 갑사가 있고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 동학사, 그리고 보물 799호의 라마식 5층 석탑이 유명한 마곡사 등의 고찰이 있다.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 마곡사의 절경을 감상하려면 봄에 찾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온갖 꽃들이 만연하고 파릇한 나뭇잎의 새순이 돋은 마곡사의 봄 풍경은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류의 물소리와 함께 자연의 일부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a 남쪽 가람에 위치한 마곡사 해탈문. 해탈문 왼쪽에 영산전이 있다.

남쪽 가람에 위치한 마곡사 해탈문. 해탈문 왼쪽에 영산전이 있다. ⓒ 이인우

그러나 무더운 여름에 마곡사를 찾는 발걸음도 좋으리라. 계류를 따라 마곡사로 오르는 길은 뜨거운 태양을 가려 주는 나무 그늘로 인해 시원함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주차장으로부터 마곡사까지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산책을 겸한 마곡사 기행이 가능하다. 아직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7월 중순의 마곡사는 여름 방학을 맞아 여름불교학교에 입학한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계류의 물소리, 매미 울음소리와 어우러져 더욱 시원함을 느끼게 했다.

a 해탈문을 지나 극락교를 지나기 전에 위치한 천왕문. 극락교를 지나면 북원으로 향한다.

해탈문을 지나 극락교를 지나기 전에 위치한 천왕문. 극락교를 지나면 북원으로 향한다. ⓒ 이인우

마곡사는 640년(선덕여왕 9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람 면모를 갖춘 시기는 신라 말 보조 체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폐사가 된 채 도둑 떼가 차지하고 있던 것을 고려 중기인 1172년(명종 2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왕명으로 도둑들을 몰아내고 중창해 대가람을 이룩했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때 병화로 또다시 60년쯤 폐사가 되는 비운을 맛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조계종 6교구 본사로서 계룡산 갑사 등 충청남도 70여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a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배치된 북쪽 가람(북원)의 전경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배치된 북쪽 가람(북원)의 전경 ⓒ 이인우

a 대웅보전.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다.

대웅보전.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다. ⓒ 이인우

마곡사의 가람 배치와 건물들은 건축학적인 사료 가치가 매우 커 대웅보전(보물 801호), 대광보전(보물802호), 영산전(보물 800호), 5층 석탑(보물 799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특히 보물 799호 5층 석탑은 전 세계적으로 단 3개 만이 남아 있는 라마교 양식의 불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a 보물 799호 라마교 양식의 5층 석탑. 전세계 단 3개뿐이다.

보물 799호 라마교 양식의 5층 석탑. 전세계 단 3개뿐이다. ⓒ 이인우

이 탑의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 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지며 정확한 연대는 전해져 오지 않는다. 즉 고려 후기 원 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 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 고리가 발견되었다.

a 남쪽 가람과 북쪽 가람을 이어주는 극락교. 다리 아래에는 잉어를 비롯한 물고기가 많아 볼거리를 제공한다.

남쪽 가람과 북쪽 가람을 이어주는 극락교. 다리 아래에는 잉어를 비롯한 물고기가 많아 볼거리를 제공한다. ⓒ 이인우

마곡사의 가람 구조는 경내를 가로지르는 개울을 따라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물 800호로 지정된 영산전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 가람과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 가람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가람이 두 영역으로 이루어진 곳이 마곡사만은 아니지만 가람 배치 방법만은 마곡사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영산전은 일반인들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건물 가까이에서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멀리에서 바라본 영산전과 그 주변의 가람 배치는 분명 북쪽 가람의 대광보전과 그 부속 건물들의 배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a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영산전의 현판(세조 글씨)과 대광보전의 현판(강세황 글씨)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영산전의 현판(세조 글씨)과 대광보전의 현판(강세황 글씨) ⓒ 이인우

대광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 화가인 강세황의 작품이며 대웅보전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또 영산전의 그것은 김시습을 만나러 마곡사에 왔던 세조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며 남긴 글씨라고 한다. 마곡사를 찾아 각 건물의 현판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도 산사를 찾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겠다.


a 마곡사 입구의 백범 선생 조각상과 광복 후에 심었다는 향나무.

마곡사 입구의 백범 선생 조각상과 광복 후에 심었다는 향나무. ⓒ 이인우

보광대전 마당에는 5층 석탑과 함께 푸른 솔잎과 그 모양이 아름다운 향나무가 심겨져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범인 일본군 특무장교를 처단한 후 인천 형무소에서 옥살이하다 탈옥해 마곡사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백련암에 은거하며 도를 닦기도 했다. 마곡사 경내의 이 푸른 향나무는 해방 후 김구 선생이 그때를 회상하며 심은 것이다.

a 마곡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굴뚝 풍경

마곡사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굴뚝 풍경 ⓒ 이인우

마곡사는 여느 고찰들처럼 건물이 화려하거나 또 가람이 크지도 않다. 영산전을 중심으로 거의 붙여져 있는 듯한 남쪽 가람과 대광보전의 북쪽 가람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인지 인근의 갑사나 동학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마곡사가 갑사나 동학사를 관장하는 본사임에도 말이다.

계룡산의 동학사나 갑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태화산 마곡사. 하지만 강세황, 김생, 세조의 현판 글씨를 감상하고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을 돌아보며 개울가에 발 담그고 산새와 매미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 무더운 여름을 마곡사에서 시원 하게 보내는 방법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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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그리고 조선중후기 시대사를 관심있어하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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