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생물을 살리는 '선인장 쉼터'

[그림책이 좋다 26] <선인장 호텔>을 보며

등록 2004.07.26 14:33수정 2004.07.2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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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을 잊고 사는 우리들

어젯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택시 안에서도 매미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끄러운 도시에서 매미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귀에는 아주 또렷하게 들립니다. 귀를 찢을 듯이 큰소리로 가게마다 틀어놓은 노랫소리보다 매미소리가 더 잘 들립니다.


여의도에는 매미가 너무 많아 시끄러워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는데, 자칫 잠 못 자게 방해하는 이들 매미를 다 죽이려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택시기사는 요즘 서울에 매미와 잠자리가 참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잠자리를 먹이가 될 만한 날벌레가 많으니 많겠죠" 하고 대꾸했습니다. "날벌레가 낮이고 밤이고 엄청나게 많고 박쥐가 살 수 없으니 잠자리 먹이는 더더욱 늘어나고요" 하고 덧붙였습니다. 택시기사는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 같다"며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듯 말합니다.

매미도 여러 가지가 있어 우는 소리에 따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보리가 익을 무렵 우는 보리매미, 나락이 익을 무렵 우는 나락매미, 가을에 우는 시이롱매미(쓰르라미), 아주 큰 소리로 우는 말매미…. 그런데 이제는 보리매미, 나락매미를 구경하기 힘들고 쓰르라미도 보기 힘들다지요(시골에 있으면서도 보리매미 소리 듣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이런 매미소리를 하나하나 가려내고 알아내는 사람은 없지만요.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는데도 서울에서는 개구리를 볼 수 없어요. 개구리도 없지만 뱀도 없습니다. 가을이 아닌데도 벌써 살살이꽃(코스모스)이 고속도로 길섶에 핍니다. 늦여름부터 따던 담뱃잎은 벌써부터 따고, 철 따라 먹던 열매는 철없이 아무 때나 가게에서 사먹어요. 이러다 보니 우리 사람들 마음이 '철없어'지고, '때없어'지며, 사람다운 마음을 잃고 '자연스러운' 모습조차 사라지지 싶어요.

이런 우리에게 철다움, 때있음, 사람다움, 자연스러움을 되살릴 수 있는 무슨 책이라도 한 권 읽고, 무슨 일이라도 하나 하지 않는다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질까 걱정스럽습니다. <선인장 호텔>이란 그림책을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a <선인장 호텔> 겉그림입니다.

<선인장 호텔> 겉그림입니다. ⓒ 마루벌

<2> 그림책 <선인장 호텔>

그림책 <선인장 호텔>을 보니 환경생태 전문가 '레이철 카슨(레이첼 카슨)'이 지은 <침묵의 봄, 에코리브로>, <잃어버린 숲, 그물코>, <우리를 둘러싼 바다, 양철북> 같은 책이 떠오릅니다.


레이철 카슨은 "자연환경을 짓밟는 공해산업을 내쫓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켜야 합니다" 라고 외친 사람이 아니에요.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하고 훌륭한지를 꼼꼼하게 살펴서 아주 그윽하고 부드럽게 우리를 이끕니다. 그림책 <선인장 호텔>도 레이철 카슨 책처럼 차분하게 선인장 이야기를 펼쳐요.

아메리카 사막에서 태어나서 이백 해가 넘도록 살다가 거센 바람에 휩쓸려 쓰러지는 '사구아로 선인장'이라는 큰 나무. <선인장 호텔>은 '사구아로 선인장'이 자라는 모습, 나이에 따라 크기가 얼마나 달라지고, 그 때마다 어떤 사막 생물이 사구아로 선인장과 함께 살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책에 쪽수가 나와 있지 않네요 - 글쓴이 말)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겨우 엄마 손 한 뼘 크기예요. 가시 사이로 사막 갬가 오르내릴 만큼밖에는 안 되었지요…

…오십 년이 지났습니다. 선인장은 엄마 키 두 배만큼 자라, 늙은 팔로버드나무 옆에 곧고 늠름하게 섰지요. 그리고 태어난 뒤 처음으로 하얗고 노란 꽃을 꼭대기에 피웠답니다…

…육십 년이 지났습니다. 선인장 호텔은 아빠 키 세 배만큼이나 되었어요. 옆에서 큰 가지가 뻗어 호텔도 더 넓어졌습니다…

…이백 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늙은 선인장 호텔은 거센 바람에 휩쓸려 모래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어요…


저는 사막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면 겨우 들여다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이렇게 큰 선인장이 자라는 줄 몰랐어요. 더구나 그 선인장에 새들이 집을 짓고 사는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


…딱따구리가 판 구멍 끝에 새 껍질이 생겨서 물기가 마르지 않았거든요. 딱따구리는 이제 더운 낮에는 그늘지고, 추운 밤에는 따스한 훌륭한 보금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선인장은, 몸에 해로운 벌레들을 딱따구리가 잡아먹어 병에 걸리지 않게 되었지요…


아하. 이렇게 선인장과 다른 생물이 함께 살아가는군요. 먹이와 살 집을 내어주면서, 나무 목숨을 오래 지킬 수 있도록 '벌레잡이'를 받아들이면서요. 그런데 이 커다란 선인장도 여러 백 해가 지난 뒤에는 쓰러진답니다.

그 때는 이 선인장에서 살던 새들이 모두 떠난다는데, 또 다른 생물이 선인장을 찾아와요. "지네와 전갈, 개미와 흰개미들이 이 쓰러진 호텔의 새 손님이 되"고 도마뱀, 땅뱀도 쓰러진 선인장 둘레에서 자기 살 곳을 마련한다고 해요.

a 선인장 한 그루 둘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선인장 한 그루 둘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 마루벌

<3> 생태계 고리를 지켜야

사구아로 선인장은 사막 생태계를 살리고 지키는 여러 생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구아로 선인장을 마당 넓은 집에 옮겨 심어 장식으로 쓰거나 길가에 심어서 보기좋게 꾸미는데 쓴다는군요. 그래서 몰래 사막에서 사구아로 선인장을 파내어 돈 받고 파는 사람이 많답니다. '선인장 도둑'에게는 사막 생태계도, 사막 생물들이 살아갈 터전도 눈에 들어오지 않거든요. 오로지 '돈'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젯밤에 탄 택시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한 주 절반은 시골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서울로 돌아와서 쉰다고 하니, 택시기사는 "돈 걱정만 안 하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겠어요?" 하고 말합니다.

자연을 생각하고, 자연을 지키며, 우리 욕심을 줄이면서 살아가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돈이 안 되기' 마련이고, '도시 생활이 좀 불편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말로만 자연보호를 외치고 말로만 <선인장 호텔> 같은 책이 좋다고 뇌까리고 아무것도 실천하는 게 없어요.

엄청나게 사서, 쓰고, 버립니다. 이 쓰레기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생각하지 않아요. 사막에서 사구아로 선인장을 몰래 파내어 비싼 값에 팔아치우는 도둑도 문제이지만, 욕심과 탐욕에 찌들어 우리 삶을 더럽히고 무너뜨리는 바로 우리 자신도 문제예요.

북중미 사막에서 '사구아로 선인장'이 죽어간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들판과 나무와 풀과 물고기가 죽어가요. 모두모두 돈에 눈이 먼 우리 자신이 죽입니다.

그림책 <선인장 호텔>은 목소리를 높여 '자연을 지킵시다', '자연을 아름답게 가꿉시다', '모든 생명체가 골고루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들이 욕심을 줄이거나 버리며 함께 살아갑시다' 하고 외치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마음을 우리에게 슬그머니 보여주고 가르쳐 주어요.

<4> 몇 가지 아쉬운 번역

잘 빚은 그림책 <선인장 호텔>을 보며 아쉬운 대목은 번역입니다. 어린이들이 이 책을 많이 볼 텐데, 어린이 눈높이에 안 맞고 우리 말법에 안 맞는 말투와 낱말이 곳곳에 보여요.

┌ 뜨겁게 메마른 사막의 어느 날이었어요
│=> 뜨겁게 메마른 사막에서 어느 날이었어요

├ 선인장을 가릴 만큼의 그늘은 늘 남아 있답니다
│=> 선인장을 가릴 만한 그늘은 늘 남아 있답니다

├ 이 쓰러진 호텔의 새 손님이 되었지요
└=> 이 쓰러진 호텔에서(호텔을 찾는) 새 손님이 되었지요


이 세 군데는 토씨 '-의'를 잘못 쓴 곳입니다. 토씨 '-의'는 소유격이 아닌 자리에서는 쓸 수 없습니다. 어린이책이라면, 더구나 아주 어린 아이도 아버지 어머니가 읽어서 들려주는 그림책이라면 이런 말을 쓰면 안 됩니다. 어릴 적부터 잘못된 말법에 길들고 마니까요.

책이름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미국 그림책이니 '선인장 호텔(hotel)'이라 했겠지만, 이 책 한쪽에서는 "따스한 훌륭한 보금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라고도 써요. 그러니까 굳이 '호텔'이라 할 것 없이 '보금자리'나 '쉼터'란 말을 썼어도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 이 사막에서 새 호텔을 짓기에 딱 알맞은 곳을 찾은 것입니다
└=> 이 사막에서 새 쉼터(보금자리,둥지)를 짓기에...


책이름을 <선인장 쉼터>나 <선인장 보금자리>로 했다면 더 어울렸지 싶어요. 이 그림책을 펴낸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호텔'이라고 쓰는 편이 알맞았겠지만, 우리 나라 문화나 사회를 돌아본다면 아무래도 '쉼터-보금자리'로 쓰는 편이 더 낫습니다.

다음은 낱말과 말법에서 잘못 쓴 곳을 바로잡은 글입니다. 도움 삼아 한 번 살펴봐 주시면 고맙겠어요. 햇수를 세는 말은 한자로 된 숫자보다 우리 말로 된 숫자로 쓰면 더 좋겠고, '-들'이란 말을 쓸데없이 붙이는 일도 안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말은 복수를 나타내는 자리에서도 굳이 '-들'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선인장 호텔>은 1995년에 우리 말로 나온 뒤로 지금까지 퍽 많이 팔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그냥 팔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선인장 호텔>이란 그림책에 담은 자연 사랑을 "한국땅과 한국 자연에 맞게 빚어낸 살가운 그림책을 창작하는 데 돈을 써서, 더 아름답고 더 소중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림책 하나"를 엮어내면 좋겠어요. 번역도 좋지만 창작이 더 좋습니다. 물론 책 한 권 펴낼 때는 번역을 하면 훨씬 적게 들고 시간도 적게 걸리겠겠지만요.


┌ 씨가 그 곳에 떨어진 건 정말 다행이었어요
│=> 씨가 그곳에 떨어진 건 참 다행이었어요

├ 건조한 날이 오래 계속되다가
│=> 메마른 날이 오래 이어지다가

├ 십 년이 지났습니다 / 이십 오 년이 지났습니다 / 오십 년이 지났습니다 /
├ 육십 년이 지났습니다
│=> 열 해가 / 스물다섯 해가 / 쉰 해가 / 예순 해가

├ 비가 내리고 꽃들이 곱게 피어 났어요 / 작은 잎들을 떨구었습니다 /
├ 꽃들은 사막 친구들에게 / 몸에 해로운 벌레들을 딱따구리가 잡아먹어
│=> 꽃이 곱게 피어났어요 / 작은 잎을 떨구었습니다
│ 꽃은 사막 친구(들)에게 / 몸에 나쁜 벌레를 딱따구리가 잡아먹어

├ 보금자리를 꾸미기 위해 총총히 떠났습니다
│=> 보금자리를 꾸미려고 바삐(부지런히,서둘러) 떠났습니다

├ 딱따구리는 곧 일을 시작했습니다. 도구는 길고 딱딱한 부리 하나였어요
│=> 딱따구리는 곧 일을 했습니다. 연장은 길고 딱딱한 부리 하나였어요

├ 편안하고 넓은 방을 만들었지요
│=> 아늑하고 넓은 방을 만들었지요

├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몸을 지킵니다
│=> 사나운 동물들에게서 몸을 지킵니다

├ 아빠 키 세 배만큼이 되었어요
│=> 아빠 키 세 곱절만큼 되었어요

├ 거대한 선인장은 더이상 자라지 않았어요
│=> 커다란(크디큰) 선인장은 더는 자라지 않았어요

├ 자동차 다섯 대를 합한 것만큼 무거웠지요
│=> 자동차 다섯 대를 더한 것만큼 무거웠지요

├ 한 동물 가족이 이사를 가면
│=> 동물 식구 하나가 이사를 가면

├ 선인장 호텔을 지탱해 주던 줄기
└=> 선인장 호텔을 받쳐(버텨) 주던 줄기

선인장 호텔

브렌다 기버슨 지음, 이명희 옮김, 미간로이드 그림,
마루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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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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