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독파하며 <타잔>에 묻혀살던 여름방학

아이들은 TV보고, 타잔 흉내를 내다 나무에서 떨어졌다

등록 2004.08.02 17:22수정 2004.08.0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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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코노텔레비전인지 디제로텔레비전인지는 몰라도 다리가 큰 브라운관 앞에 모여 타잔을 즐겨봤던 시절 주말 오후는 언제나 바빴다.
삼성 이코노텔레비전인지 디제로텔레비전인지는 몰라도 다리가 큰 브라운관 앞에 모여 타잔을 즐겨봤던 시절 주말 오후는 언제나 바빴다.김용철
우리들의 영웅 타잔이 단도 하나에 머리 길게 늘어뜨리고 까만 팬티 달랑 걸치고 짝 벌어진 가슴을 편다. 이윽고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바위 위에서 드넓은 평원을 향해 승리의 소리를 맘껏 내지르며 포효하는 모습은 산만 바라보며 살던 아이들을 매료시켰다.


“아~아~아~”

그 우렁찬 소리는 밀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쫑긋쫑긋 귀 기울이는 짐승들, 협곡을 타고 바람을 몰고 온다. 한참이 지나 메아리가 들려오자 새들도 놀라 푸드득. 타잔이 있음에 정글은 살아 있다.

정글 넝쿨을 타고 수십 미터 낭떠러지나 계곡을 제 안방에서 건너뛰듯 자유로운 타잔(TARZAN)! 타잔은 해결사였다. 타잔은 정의의 표상이었다. 타잔은 무법천지 정글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절대강자였다.

사자도 부모를 죽인 표범도 적수가 되질 못했다. 그 높은 코끼리 등에 올라 초원을 걷는 털 없는 맨발의 청춘 흰 원숭이의 몸놀림과 숨소리 하나마저 빠트리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다.

“얌마 쩌짝으로 비껴봐야.”


고등학교 갈 때까지 우리 집엔 TV가 없어 옆집을 전전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이 때 처세가 중요하다. 자존심을 죄다 버릴 것, 내 집처럼 편안하게 생각할 것, 일정하게 나타나 그날도 당연히 내가 오리라는 확신을 줄 것이었다. 이왕 보는 것 당당하게 보기로 맘을 먹은 것이다.

한 집 두 집 TV가 늘어갔지만 공부 안 한다고 야단이시는 어른들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 궁리를 하는 게 나였다. 다들 무더운 여름 주말 오후 뙤약볕이 내리 쬐면 꼴 베는 건 서늘한 때로 미루고 배를 깔고 엎드려서 TV에 정신을 팔았다.


<마징가Z> <그로이저X> <은하철도999> 같은 만화영화보다 드라마 <타잔>에 더 매력을 느꼈다. 평소 만화를 고깝게 생각했던 탓도 있지만 초등학교 때 ‘모글리’가 주인공인 <정글북>으로 눈을 뜬지라 중학교 때는 건장한 사내가 그 세계를 평정하는 장대한 기개, 치타, 제인과 한 가족이 되어 군림하는 타잔에 흥미를 갖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노릇이다. 육남이가 삼국지를 물었다면 나는 확실히 타잔이었다.

중3 때였다. 서서히 집안일에서 손을 뗄 심보로 집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던 중이었다. ‘여름방학독서교실’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마침 여학생들도 합법을 가장하여 가까이 보고, 일에서 해방되는데다, 책까지 읽을 수 있으니 일석삼조 아닌가. 2등으로 신청했다.

2주간 진행된 독서교실에 매일 도시락을 싸서 학교로 갔다. 다 읽고 나서 하루는 백아산 용촌계곡 폭포 쪽으로 국어선생님이 인솔하여 소풍을 갔다. 물놀이를 하다가 각자 읽은 책을 소개하고 독후감을 발표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남녀학생들이 차례대로 발표를 한다.

내 차례가 되자 초등학교 때 읽은 <이솝우화> 한편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얼버무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들 원고지에 고치고 고쳐 발표 물을 달달 외듯 하던 대부분의 학생들과 나는 준비 상태가 달랐다. 여학생들 앞에서 덤벙댔기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게 대수가 아니었다.

그 긴 시간동안 <타잔>22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몸만 대한민국에 있었지 날이면 날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아프리카 정글에 들어가 있었다. 꿈에서도 타잔이 안내하는 숲을 따라 맹수들을 만나고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다녔다.

<타잔>은 학교도서관 책장에 숨겨져 있었다. 까만 하드커버로 판형이 음악책 크기나 되고 한 권당 두께가 450쪽을 넘었다. 보물을 발견한 나는 그 기간 동안 타잔만 읽었다.

깨알 같은 글씨여서 눈이 좋은 내게도 큰 부담이었다. 마침 속독법을 2학년 때 배웠던지라 읽는 속도가 물이 올랐으니 망정이지 내가 읽은 책 중 유흥종의 <대원군> 만큼이나 길었다. 독서교실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타잔에 빠져 연합고사를 엉망으로 치르기까지 했다.

책 속에는 성인이 되어 절대강자가 된 타잔이 아닌 표류하던 배가 가까스로 뭍에 올랐지만 부모는 표범에 물려죽고 혼자 밀림 한가운데 오두막집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원숭이들이 데려다가 기르면서부터 시작한다. 결국 핏줄을 찾아 영국으로 가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타잔이 정글로 돌아와서 끝난다는 내용이다.

첫째 권을 읽을 때는 무서웠다. 하지만 위험한 순간을 넘긴 아이는 성장하면서 남달랐다. 민첩하고 영특했다. 털 없는 자신이 무리들과 다르다는 걸 눈 간다. 건장한 청년 앞에 어느 날 나타난 제인 일행. 그 때부터 타잔의 일생에 전환기가 찾아온다. 아리따운 아가씨와 만나 사랑을 배우고 진한 키스를 해대는 청년이 부러웠다.

"아~아~아~" 외치며 줄만 있으면 아무 거나 타는 줄 알고 순진하게 살았던 동무들. 옆구리가 성치 않은 건 그 시절 그렇게 놀았기 때문일까요?
"아~아~아~" 외치며 줄만 있으면 아무 거나 타는 줄 알고 순진하게 살았던 동무들. 옆구리가 성치 않은 건 그 시절 그렇게 놀았기 때문일까요?김용철
다시 TV 앞으로 몰려 있는 아이들! “꽥꽥꽥” 원숭이들이 손짓 발짓을 해대며 절박함을 호소한다. 동료가 위험한 순간이다. 맨발로 달리다가 숲과 숲에 치렁치렁 걸린 넝쿨을 손으로 잡고 몇 백 미터를 단축하는 우리들의 타잔. 허공을 가르는 새가 었다가 땅에 닿자 고난도의 기술로 넘어지지도 않고 사뿐히 착지 한 뒤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타잔. 정말이지 이보다 멋진 사내가 세상에 있을까?

축지법을 쓴다한들 이보다 빠를까. 현장까지 달려가는 타잔은 칼 루이스보다 빠르다. “기르륵기르륵” 드르렁거리며 온 힘을 다해 물어뜯으려는 사자와 뒤엉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기를 반복한다. 함께 본 아이들은 발로 문을 차대기도 하고 옆에 있는 아이 몸을 툭툭 차며 용을 쓴다. 몰입의 경지가 이런 거다. 마치 형제 중 한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듯 응원하고 있었다.

“누구여?”
“누가 나 찼냐니까?”
“아따 그럴 수도 있지 그냐?”
“야 저러다 타잔 죽으면 큰일인데….”
“글게 말여.”
“우리가 말리러 아푸리카로 갈까?”
“가다보면 폴새 싸움 끝나부러 새꺄.”

우리들의 간절한 바람이 먹혀들어간 걸까. 질것만 같던 타잔 앞에 축 늘어진 백수의 제왕 커다란 몸집이 흐느적거린다. 영국신사의 후예답게 팬티 옆에 찬 단도는 쓸모가 없다. 숨통을 조여 맥없이 무너뜨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타잔. 차고 다니는 칼이 아까웠지만 숲 속 다른 이웃에 대한 배려에 감복하게 하는 넉넉함까지 가졌다. 박수가 쏟아졌다.

어느 날 방영분에서는 사자가 적들이 쏜 총알이 박혀 흐느끼자 또 한번 사자를 끌어안고 뒹굴다가 힘이 빠진 틈을 타서 단도로 빼주는 그 장면에서 ‘그래 사람이란 저 정도는 돼야지’ ‘역시 타잔이야!’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티끌을 털며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온 타잔과 늘 동행하는 치타. 치타는 타잔 팔뚝을 딛고 어깨에 착 걸치더니 등에 올라 “헤헤헤헤” 한가로운 어리광을 부린다. 땅에 떨어진 야자를 주워 나눠 먹는다.

어찌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던가. 아이들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아쉬움과 간절함 압권 앞에서 주눅 들어있는 모양이다. 타잔이 되어보고 싶은 아이들에게 허기가 몰려온다.

새끼줄, 칡넝쿨을 들고 뒷골로 향했다. 움푹 팬 골짜기 근처 나무에 줄을 걸어 두 손으로 꼭 붙들고 건너편으로 휘익 지나간다. “아~아~아~아~” TV로도 모자라 타잔 흉내까지 내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다. 뒤따라온 후배 녀석은 “아~아~아~” 하다가 “어~”로 바뀌더니 비명이 멈추고 개골창으로 툭 떨어졌다.

“배통아지 안 터졌냐?”
“워메 아푼거.”
“갈비대 안 나갔으니까 다행이다.”

그러기를 수차례 거듭하자 새끼줄은 닳아서 끊어지고 칡넝쿨은 나뭇가지를 빠져나왔다. 이로도 모자라 우린 산에 갈 때마다 다래넝쿨과 으름덩굴을 찾았다. 가슴팍에 나뭇가지가 박히든 돌부리에 채이든 상관없이 횡축으로 타고 옮겨 다녔다. “아~아~아~아~아~”

원조 타잔에서 2대 타잔으로 바뀐 뒤론 주인공 용모가 형편없었다. 힘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연 흥미가 반감 되었다. TV라는 세상을 현실로 받아들인 산골마을 아이에게 백아산 산골짜기를 내 집처럼 쓸고 다녀선지 타잔이 활동하던 원시림의 정글은 환상적인 자연으로 나를 초대하였다. 지금 내 상상력과 자연에 대한 애정은 그 때 다 완성이 된 지도 모르겠다.

타잔이 어느 날 출생의 비밀을 캐나가다가 나무껍에 "A" "B" "C"……"X" "Y" "Z"를 그려나가는 장면이 순간 스친다. 그 정신으로 뭘 못 배운단 말인가. 여하간 타잔은 재미있다. 그 재미난 타잔을 아이들과 함께 보고 읽을 날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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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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