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코노텔레비전인지 디제로텔레비전인지는 몰라도 다리가 큰 브라운관 앞에 모여 타잔을 즐겨봤던 시절 주말 오후는 언제나 바빴다.김용철
우리들의 영웅 타잔이 단도 하나에 머리 길게 늘어뜨리고 까만 팬티 달랑 걸치고 짝 벌어진 가슴을 편다. 이윽고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바위 위에서 드넓은 평원을 향해 승리의 소리를 맘껏 내지르며 포효하는 모습은 산만 바라보며 살던 아이들을 매료시켰다.
“아~아~아~”
그 우렁찬 소리는 밀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쫑긋쫑긋 귀 기울이는 짐승들, 협곡을 타고 바람을 몰고 온다. 한참이 지나 메아리가 들려오자 새들도 놀라 푸드득. 타잔이 있음에 정글은 살아 있다.
정글 넝쿨을 타고 수십 미터 낭떠러지나 계곡을 제 안방에서 건너뛰듯 자유로운 타잔(TARZAN)! 타잔은 해결사였다. 타잔은 정의의 표상이었다. 타잔은 무법천지 정글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절대강자였다.
사자도 부모를 죽인 표범도 적수가 되질 못했다. 그 높은 코끼리 등에 올라 초원을 걷는 털 없는 맨발의 청춘 흰 원숭이의 몸놀림과 숨소리 하나마저 빠트리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다.
“얌마 쩌짝으로 비껴봐야.”
고등학교 갈 때까지 우리 집엔 TV가 없어 옆집을 전전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이 때 처세가 중요하다. 자존심을 죄다 버릴 것, 내 집처럼 편안하게 생각할 것, 일정하게 나타나 그날도 당연히 내가 오리라는 확신을 줄 것이었다. 이왕 보는 것 당당하게 보기로 맘을 먹은 것이다.
한 집 두 집 TV가 늘어갔지만 공부 안 한다고 야단이시는 어른들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 궁리를 하는 게 나였다. 다들 무더운 여름 주말 오후 뙤약볕이 내리 쬐면 꼴 베는 건 서늘한 때로 미루고 배를 깔고 엎드려서 TV에 정신을 팔았다.
<마징가Z> <그로이저X> <은하철도999> 같은 만화영화보다 드라마 <타잔>에 더 매력을 느꼈다. 평소 만화를 고깝게 생각했던 탓도 있지만 초등학교 때 ‘모글리’가 주인공인 <정글북>으로 눈을 뜬지라 중학교 때는 건장한 사내가 그 세계를 평정하는 장대한 기개, 치타, 제인과 한 가족이 되어 군림하는 타잔에 흥미를 갖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노릇이다. 육남이가 삼국지를 물었다면 나는 확실히 타잔이었다.
중3 때였다. 서서히 집안일에서 손을 뗄 심보로 집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던 중이었다. ‘여름방학독서교실’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마침 여학생들도 합법을 가장하여 가까이 보고, 일에서 해방되는데다, 책까지 읽을 수 있으니 일석삼조 아닌가. 2등으로 신청했다.
2주간 진행된 독서교실에 매일 도시락을 싸서 학교로 갔다. 다 읽고 나서 하루는 백아산 용촌계곡 폭포 쪽으로 국어선생님이 인솔하여 소풍을 갔다. 물놀이를 하다가 각자 읽은 책을 소개하고 독후감을 발표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남녀학생들이 차례대로 발표를 한다.
내 차례가 되자 초등학교 때 읽은 <이솝우화> 한편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얼버무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들 원고지에 고치고 고쳐 발표 물을 달달 외듯 하던 대부분의 학생들과 나는 준비 상태가 달랐다. 여학생들 앞에서 덤벙댔기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게 대수가 아니었다.
그 긴 시간동안 <타잔>22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몸만 대한민국에 있었지 날이면 날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아프리카 정글에 들어가 있었다. 꿈에서도 타잔이 안내하는 숲을 따라 맹수들을 만나고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다녔다.
<타잔>은 학교도서관 책장에 숨겨져 있었다. 까만 하드커버로 판형이 음악책 크기나 되고 한 권당 두께가 450쪽을 넘었다. 보물을 발견한 나는 그 기간 동안 타잔만 읽었다.
깨알 같은 글씨여서 눈이 좋은 내게도 큰 부담이었다. 마침 속독법을 2학년 때 배웠던지라 읽는 속도가 물이 올랐으니 망정이지 내가 읽은 책 중 유흥종의 <대원군> 만큼이나 길었다. 독서교실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타잔에 빠져 연합고사를 엉망으로 치르기까지 했다.
책 속에는 성인이 되어 절대강자가 된 타잔이 아닌 표류하던 배가 가까스로 뭍에 올랐지만 부모는 표범에 물려죽고 혼자 밀림 한가운데 오두막집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원숭이들이 데려다가 기르면서부터 시작한다. 결국 핏줄을 찾아 영국으로 가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타잔이 정글로 돌아와서 끝난다는 내용이다.
첫째 권을 읽을 때는 무서웠다. 하지만 위험한 순간을 넘긴 아이는 성장하면서 남달랐다. 민첩하고 영특했다. 털 없는 자신이 무리들과 다르다는 걸 눈 간다. 건장한 청년 앞에 어느 날 나타난 제인 일행. 그 때부터 타잔의 일생에 전환기가 찾아온다. 아리따운 아가씨와 만나 사랑을 배우고 진한 키스를 해대는 청년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