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개비를 닮은 '백화등'

내게로 다가온 꽃들(72)

등록 2004.08.09 09:26수정 2004.08.0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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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꽃은 때가 되면 피고, 가장 화려했던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미련없이 자리를 비켜줍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그리도 짧기에 늘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기도 하고, 늘 그 자리에서 서성이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바람개비를 만들어 들판에서 뛰어다니던 추억을 생각나게 한 바람개비를 닮은 꽃, 백화등을 만난 것은 지난 5월이었습니다.


문득 유년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것들을 만나면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쁘게 살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조금 천천히 걸어왔어도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숨차게 달려왔는지 후회 같은 것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아직은 앙다문 입술이지만 저 앙다문 입술에 담고 있을 아름다운 사연들이 입술을 열기만 하면 쉼 없이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쉼 없이 쏟아내도 수다처럼 들리지 않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주옥 같은 소리로 남을 것 같습니다.

김민수
백화등은 그 흔한 꽃말도 없습니다. 나에게 그 꽃말을 지어보라고 한다면 '봄바람'이라고 붙여주고 싶습니다. 봄이 한창 무르익을 시기에 피어나는 꽃이기도 하지만 그 향기가 좋아 봄처녀들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을 것만 같습니다.

봄바람 불면 앙다문 작은 입술을 활짝 열고
봄바람 타고 바람개비를 닮은 꽃을 피웠다
바람이 불어도 돌지 못하는 바람개비꽃
그러나 슬퍼하지 말아라
너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담장을 타고 나무를 타고
돌고 또 돌아
그 앙다문 입술 열어 전해준 노랫소리가
들판에 가득하니 슬퍼하지 말아라
봄바람에 옹기종기 빙글빙글 천진난만 백화등.
<자작시-백화등>


김민수

김민수
백화등과 마삭줄은 비슷해서 구분이 잘 안가는 식물이고, 어떤 분들은 마삭줄과 백화등이 같은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마삭줄과 백화등은 다릅니다.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마삭줄과 백화등은 거반 비슷한데 마삭줄의 잎이 조금 길고, 백화등의 잎이 그에 비해 조금 둥글다는 것 외에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간혹 늦가을이나 초겨울에도 한두 송이씩 바보꽃을 피우는 경우가 있는데 지난 해 초겨울 서귀포시에 있는 화가 이중섭이 기거했던 집의 돌담에서 백화등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 어쩌면 그렇게 바보 같이 살았기에 그렇게 큰 족적을 남길 수도 있었을 거야!'

천재화가 이중섭, 그러나 온갖 생활고와 힘겨운 삶을 강요당했던 이중섭의 삶을 닮아 핀 꽃 같아서 한참을 바라보았던 마음 짠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꽃입니다. 아마 백화등을 만날 때마다 한 번씩은 화가 이중섭을 생각할 것입니다.


김민수
백화등은 워낙 꽃이 많이 피는데다가 덩굴성으로 나무나 돌담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어찌 담아야 할지 망설여지는 꽃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꽃들이 한 송이 또는 몇 송이씩 피어있거나 아니면 아주 작은 꽃들이 모여 한 송이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리 작지도 않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백화등을 보면 영락없이 동네 개구쟁이들이 양지에 옹기종기 모여 딱지치기나 구슬치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김민수
'아들아, 아빠가 어렸을 때에는 가게에서 파는 장난감 같은 것들이 흔하지 않았단다. 기껏해야 고무물총이나 구슬 정도였고 아빠와 친구들은 주로 자연에서 놀이감을 구했단다. Y자형의 작은 나무는 새총을 만드는데 그만이었고, 수수깡과 종이만 있으면 바람개비도 뚝딱, 제비꽃은 꽃반지로, 들풀들은 소꿉놀이 할 때 맛난 음식재료로 사용했단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은 '구멍가게' 같았어. 물총이나 구슬, 팽이, 화약, 딱지 같은 것들과 함께 쫀드기와 달고나 같은 것들이 가득한 일명 '구멍가게'는 어떤 물건이 들어왔나 구경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추석이나 설날 같은 때 이전부터 눈 도장을 찍고 또 찍어놓았던 색바랜 장난감을 사는 것이 고작이었단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구멍가게'에서 놀이감도 얻고, 군것질거리도 얻었으니 어쩌면 너희들보다 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도 할 수 있지. 물론 너희들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말이다. 이 백화등이 아빠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바람개비'를 꼭 닮았구나. 너도 지난 봄 이 꽃을 보고 아빠가 색종이로 만들어 준 바람개비를 날린 적이 있지? 올해도 만들어 줄까?'

김민수
아이들의 기억에는 이름보다 그 향기나 모양새가 깊게 각인될 것입니다. 꽃구경을 나갈 때마다 틈만 나면 좇아 다니는 막내가 백화등을 보자마자 "아빠, 바람개비꽃이다!"했습니다. 아마 "아빠, 백화등이다!"했으면 좀 맛이 덜했을 것입니다.

물론 막내가 좋아하는 '강아지풀'이야 "강아지풀이다!"해도 귀엽겠지만 어른들도 기억하기 헷갈리는 이름이 아이들의 입에서 척척 나온다면 기특하긴 하겠지만 뭔가 그 이름 속에 상상력이 갇힌 듯 답답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너무 어릴 적부터 문자 속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각진 검정색 글자에 갇혀버린 상상력을 보는 듯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김민수
바람개비를 닮은 백화등. 봄에 피어 이미 다 지고 난 꽃들이지만 때를 놓쳐 무더운 여름에 소개해도 그 맛이 나는 이유는 꽃의 모양새가 시원스럽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선풍기 날개를 닮은 꽃, 저 꽃들이 한꺼번에 '뚜드륵 뚜르득' 돌아가면 백화등의 향기와 함께 전해지는 그 시원함은 에어컨 바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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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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