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15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09 10:27수정 2004.08.0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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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가 어떤 경로로 성 안에 침투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흘째부터 소식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보에 의하면 근위병이 1천이고, 전투 시엔 누구나 창을 들 수 있는 남자가 또 2천 이상, 병장기로는 노포용 경마차가 수십 대, 그밖에도 화살, 투창 병이 있으며 그 모든 군사들이 아침저녁으로 궁전을 한바퀴 도는 사열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하루에 두 차례나 사열식을 갖은 이유는 군주가 자기 군력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2년 전 얼굴이 검은 드라비다 족의 급습에 혼겁을 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놀란 군주는 당장 군력을 증강하고 자기 군사들이 얼마나 철통같은지 아침저녁으로 확인해야만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닷새째 온 연락은 군주의 생일이 앞으로 9일 후이며, 이때를 위해 술과 음식이 무한정으로 준비되고 있다고 했다.

"호기입니다! 오늘 당장 군사 이동을 시작합시다."

강 장수가 흥분까지 하며 말했다. 에인은 강 장수의 적극성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시파르를 칠 때까지는 의욕이 펄펄 넘쳤는데 그 뒤부터 조금씩 기운이 가라앉는 듯해서 은근히 걱정이었으나 공연한 기우였다.


그랬다. 군주가 생일이라면 당자들에겐 가장 큰 축제요, 그런 축제 때만은 어디에나 기강이 해이해지는 법, 강 장수는 군장의 본능으로 그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니 단번에 '호기'로 물어버린 것이다. 에인은 강 장수의 제안을 즉각 수용했다.

"나도 강 장수 의견에 적극 찬성이오. 지금 곧 출정 준비로 돌입합시다."
"그럼 출발시간은 언제입니까?"
"내 생각엔 자정이 좋을 것 같소. 그땐 모든 주민들이 잠들 것이고, 그 틈을 타서 도시를 빠져나가면 아무도 군사이동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인데, 강 장수의 의견은 어떻소?"


에인이 강 장수에게 확인 차 물어보았다.

"치밀하신 생각이십니다. 군사들이 다 빠져나가는 걸 주민들이 알아야 좋을 게 없을 테니 자정이 가장 안전한 시간입니다."
"그럼 강 장수께서 어서 세부 지시를 내리시오."

강 장수는 곧 천막, 무기 등은 지금 마차에 실어둘 것, 식량은 열흘치만 준비하고 나머지는 상황 봐가면서 운반할 것, 그리고 군사들에겐 자정까지 휴식을 주라는 등의 지시를 내렸다.

그의 지시가 끝나자 참모들은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강 장수도 야장 방에 가봐야 한다고 자리를 뜨자 에인이 혼자 남았다. 그때 두두의 할머니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 전에 인사말을 하고 갈 참이었다. 에인은 벌떡 일어서 아주 반갑게 할머니를 맞았다.

"이런, 제가 한발 늦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어서 이리 좀 앉으십시오."

할머니는 의자에 앉으며 '왜 저를 찾으실 생각이었습니까?'하고 물었다.

"여태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지난번 전투에서 할머니께서는 밤잠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셨고, 또 죽어가던 많은 부상자를 살려내셨지요. 그 덕에 군사들 사기도 아주 좋아졌습니다. 다친다 해도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할머님께서 보여주신 거지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야 제가 마땅히 할 일이었지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할머니의 얼굴은 시큰둥해보였다. 진작에 감사를 드리지 않아 마음이 상하셨나? 사람이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고 그걸 늦추면 부채가 된다고 했는데…. 에인이 서둘러 말했다.

"오늘 저희들은 출정을 합니다. 그 전에 할머니께 작은 보답이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예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 것이구요."
"무엇입니까?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드릴 수 있으니 알려만 주십시오."
"그럼 먼저 두 가지만 해주시오."
"겨우 두 가지입니까? 좋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첫째, 앞으로 나를 부를 땐 할머니가 아닌 의원이라고 불러주시는 것."

물질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호칭이었다. 에인이 더 활짝 웃으며 그녀 호칭을 복창했다.

"예, 의원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무엇인지요?"

할머니의 표정이 당장 진지해졌다. 그녀는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을 꼭 쥐면서
"지금 우린 서로 시간이 없으니 바로 말하겠소. 그 둘째의 요구는 나도 에리두전투장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오"라고 마치 선언을 하듯이 엄숙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에인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에리두까지나요?"
"약품도 미리 준비가 다 되었소. 그리고 닌이도 그 성에 들어갔으니 지금쯤 약제실 파악을 전부 끝냈을 것이오."
"닌이가 에리두에 갔다구요? 언제 말입니까?"
"두두와 함께 갔지요. 그들은 사촌이니까 오누이로 위장하기도 쉽겠고, 그래서 내가 보냈소이다."

"그랬군요."
에인은 그 용감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문득 여와 여신이 떠올랐다. 백성이 굶주릴 때는 곡식을 주시고 목이 마려우면 비를 주시며 병든 사람은 당신의 젖을 주어 살려내셨다는 여신, 사람을 만들고 또 그 사람을 살려내시는 거룩하신 분. 여기서는 이 할머니의 역할이 바로 그와 같지 않느냐…. 에인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의원님, 의원님을 우리 새 나라의 의원대신으로 임명합니다."
"의원대신?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오?"

달갑잖은 반응에도 에인은 진심으로 말했다.

"단 자리에 오르실 때까지는 그 두건을 쓰고 계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여성임을 미리 안다면 걸림돌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두건이야 쓰고 있을 테지만 그 직함은 사양하겠소이다. 그저 부상자나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만 해주시면 그것으로도 은혜는 크게 갚으시는 것입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손을 잡으며 '의원님, 이번에는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도록 축원도 드려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러리다. 자, 그럼 나도 할 일이 많으니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웃어준 후 등을 돌려 나갔다. 웃을 때는 자상한 할머니였는데 뒷모습은 벌써 신품이 흘러보였다. 그래, 저이는 여와 여신의 분신, 그 대리자임에 틀림없다, 에인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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