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바다, 백두산까지 장엄한 여로

[8. 15특집 - 다시 항일유적지를 가다 10] 백두산 가는 길

등록 2004.08.09 16:32수정 2004.08.09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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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덮인 백두산 천지
눈에 덮인 백두산 천지박도
백두산 들머리 백산에서 묵다

제6일 2004년 5월 30일(일) 맑다가 흐리고 비가 내림



간밤에 늦은 시간(22:30)에 백산에 도착하여 백산시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백산(白山)이란 '장백산(長白山)'의 준말인가 보다.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른다. 지도를 펼치니 여기서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산시' 시계(市界)로 그 넓이가 우리나라의 웬만한 도(道) 만큼 넓어 보였다.

백산의 아침, 도시 전체가 싱그러웠다
백산의 아침, 도시 전체가 싱그러웠다박도
애초 안동문화방송국에서 세운 답사 일정으로는, 오늘 통화에서 다시 심양으로 가서, 거기서 비행기로 연길 행이었다. 그렇게 예약까지 다 해 두었다.

그런 걸 이항증 선생과 필자가 들어 답사 여정을 수정했다. 통화에서 백산 무송을 거쳐 백두산으로 가자는, 옛 우리 독립전사들도 그 길로 이동했다는 얘기에 방송국 측에서 쉽사리 동의가 되었다. 그래서 간밤 통화에서 일부러 백두산이 가까운 백산까지 와서 묵었던 것이다.

이 여정은 시간도 단축되고 비용도 훨씬 절약되는 장점은 있는데 견주어, 이 코스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다소 불안한 점은 있었다.


하지만 걸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승용차로 가는데 무슨 대순가. 1920년 청산리 전투 직전에 우리 독립군 전사들은 한 달여에 걸쳐 이 길을 걸어서 이동했던 피눈물의 그 길이 아닌가.

05:30, 빈관을 벗어나 시가지 산책에 나섰다. 산악지대인데다가 이른 탓인지 도시는 뿌연 안개로 자욱했다. 시간이 지나자 차차 안개가 걷히며 도시가 나그네에게 수줍게 선보였다.


백산은 꽤 큰 도시로 첫 인상이 상큼했다. 아마도 산악지대 도시이기 때문이리라. 이국의 풍물을 몇 장면 카메라에 담고는 다시 빈관으로 돌아왔다.

07:30, 빈관 찬청(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들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메뉴도 다양했고 우리 입에 맞는 나물반찬도 많아서 맛있게 먹었다.

오늘 일정은 조반 후 조문기 권중보 두 분 인터뷰를 한 뒤 곧장 백산을 출발하여 백두산까지 이동하는 일이다.

필자와 대담을 나누는 조문기 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오른쪽)
필자와 대담을 나누는 조문기 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오른쪽)박도
08:30, 빈관 숙소에서 이국성씨의 통역으로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 겸 무순시 사회과학원 만족연구소 소장인 조문기(56) 박사와 대담을 나눴다.

그는 현재 요녕성 신빈현 만족자치현 신빈진 신흥가에서 살고 있는 바, 굳이 조선 역사를 공부한 까닭을 물었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조선족이 많이 살았고, 그곳이 조선족 독립운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겨레의 동북 삼성지역 항일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대부분 필자가 다른 문헌에서 본 바와 다름이 없었다. 필자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묻자, 신흥무관학교를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이 학교는 망명 조선민족 지도자들이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되찾겠다고 항일 전사를 기르고자 세운 학교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일제와 정면으로 무장 투쟁한 곳에는 으레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런 무장 투쟁은 중국인들에게도 항일사상을 고취해 주었다. 그래서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부 중국인 학생도 있었다. 중국인을 깨우친 학교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이 학교는 사범학교와 같은 역할로 졸업생들이 다른 조선족학교의 교사나 교관으로 조선족 2세들을 교육시켰다. 이들 졸업생들이 후일 동북항일연군, 팔로군, 홍군, 국민혁명군 등 항일무장단체에서 활약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는 조선과 중국의 해방에도 이바지하였고, 또 중국인을 크게 각성시킨 학교였다. 조선이나 중국의 해방이 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무관학교 출신들이 투쟁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고 했다.

필자가 바람직한 한중관계를 묻자, 그는 한 마디로 "평화(平和)"라고 답했고, 무엇보다 조선반도의 '화평(和平)'이 동북아의 평화에 매우 중요하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반도가 빨리 통일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동포 권중보 선생
동포 권중보 선생박도
이어서 통화현 집안시에 사시는 동포 권중보(72) 선생을 모셨다.

권 선생의 고향은 경북 봉화로 1910년 조부모들이 생활고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쪽박을 차고 고향을 떠나 만주로 왔다고 했다. 당신은 전직 교육자로서, 지금은 조선족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며 향토 사학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태 전, 통화 일대에서 조선족들의 성금을 한 푼 두 푼 모아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 터에다가 '신흥무관학교 기념비'를 세웠으나 중국정부에서 기념비를 깨트려 늪에다 던져버려서 몹시 가슴 아프다고 하면서, 한국정부가 나서서 중국정부에 외교로 해결하여 항일유적지에 표지석만이라도 세웠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백산시 빈관 앞에서 답사단 일행 기념 촬영(왼쪽 부터 필자, 조문기, 이항증, 권중보, 이국성, 권순태, 김시준, 최종태, 손대훈. 이 사진이 권 선생님께 부디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백산시 빈관 앞에서 답사단 일행 기념 촬영(왼쪽 부터 필자, 조문기, 이항증, 권중보, 이국성, 권순태, 김시준, 최종태, 손대훈. 이 사진이 권 선생님께 부디 전해지기를 바랍니다)박도
백산에서 백두까지

대담을 마친 후 짐을 들고 로비로 나갔다. 여기서 조문기 권중보 선생과 작별했다. 권중보 선생은 우리 일행에게 가까운 시일 내 꼭 집안에 들러 고구려의 유적을 보고 가라고 간곡히 초대했다.

필자가 요즘 한중간 고구려 문제로 미묘한데 괜찮으냐고 여쭙자, 권 선생은 집안에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셨다. 필자가 기념촬영을 하자 권 선생은 사진을 꼭 부쳐달라고 거듭거듭 부탁했다.

그런데 서로 경황 중이었던지 주소를 적어두지 않아서 여태 사진을 부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은 시공을 초월하여 전파되기에 권 선생님이 이 기사를 보시고 사진도 다운 받았으면 좋겠다.

11:30, 마침내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 백산을 출발했다. 출발 전, 연변대학 김춘선 교수에게 안내를 부탁하자 당신 후배인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김태국 박사를 연결해 주었다. 서로 생면부지인지라 오후 6시 장백산 매표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도상으로 그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백두산 가는 길
백두산 가는 길박도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도 그랬지만 백산에서 백두산 오르는 길도 경사가 심하지 않았다. 예사 길을 달리는 것 같은데 서서히 백두산을 오르는 경사가 매우 완만한 길이었다.

백두산으로 가는 도중에 정우현(靖宇縣)이 나왔다. 동북항일연군의 양정우 장군 이름을 붙인 도시였다. 동북에는 항일 명장들의 이름을 붙인 지명을 더러 볼 수 있다. 북만의 상지시도 조상지(趙尙志)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충남 예산은 '봉길'읍이나 '매헌'읍으로, 내 고향 구미는 '허위'시나 '왕산'시로 고쳐야 민족정기가 겨레의 가슴에 스밀 텐데, 필자의 이런 얘기를 '미친 놈 잠꼬대'로 여기지나 않을지.

백두산 가는 길은 차량도 뜸한 온통 자작나무 숲길이었다. 아주 쾌적한 포도(鋪道)였다. 길가에 고사리를 뜯는 남매가 보여 차를 세우고 해맑은 그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백두산 가는 길섶의 자작나무 숲
백두산 가는 길섶의 자작나무 숲박도

고사리를 캐는 남매, 그들의 웃음이 티없이 맑다
고사리를 캐는 남매, 그들의 웃음이 티없이 맑다박도

14:00, 무송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백두산으로 달렸다. 거기서부터는 비포장도로였다. 좁은 숲길을 넓히는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갈수록 길이 이만저만 험하지 않았다.

이런 멀고도 험한 길에 군장을 메고 한 달여 도보로 이동하였던 독립전사들을 생각하니 승합차를 타고 가면서도 푸념하는 필자가 몹시도 미웠다.

그때의 기록을 보면, 독립전사들은 날이 저물면 아무 숲 속에서나 자고 비상 식량도 떨어지면 풀뿌리를 캐 드시면서 이동하셨다고 한다. 그야말로 풍찬노숙-바람을 먹고 이슬에 잠잤다- 하였다고 한다.

그 어른들 영령에게 친일파를 용서하자고, 내일을 위해 이대로 덮어버리자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하실까?

"네 이놈! 네 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어제가 없는 오늘이 어디 있고, 오늘이 없는 내일이 어디 있느냐"고 대성통곡하실 것 같다.

애초에 서너 시간이면 넉넉하리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워낙 깊은 산중이라 손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서 길이 곤죽이 되어서 승합차가 지그재그로 달리기에 속력을 낼 수 없었다. 무송을 출발한 후 계속 쉬지 않고 달려도 김태국 박사와 약속한 시간에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송현 시가지
무송현 시가지박도

온통 숲으로 뒤덮인 백두산 가는 길
온통 숲으로 뒤덮인 백두산 가는 길박도

19:00, 이미 땅거미가 져서 어두웠다. 마침내 백두산 들머리 마을 이도백하에 닿았다. 그제야 손 전화가 연결되었다. 김태국 박사에게 깊이 사죄하자 당신도 일기가 고르지 못해 늦을 줄 알았다면서 이나마 늦은 게 다행이라고 내 마음을 편케 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운전기사와 함께 이미 약속장소인 장백산 매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19:40,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장백산 매표구 앞에 도착했다. 김태국(40) 박사가 손을 크게 흔들면서 환영했다. 억센 북한 말씨로 생소했지만 시원시원했다. 그의 안내로 장백산 대우호텔에 투숙했다.

그새 비가 진눈깨비로 변하고 바람이 부는 게 날씨가 몹시 추웠다. 백산에서 백두산까지 생각보다 먼 길이었지만, 숲의 바다를 헤쳐온 듯 새로운 비경을 실컷 맛보았던 장엄한 여로(旅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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