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희생자가족 "한일협정 무효" 이틀째 철야농성

등록 2004.08.16 21:10수정 2004.08.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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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과거문제청산을 촉구하는 태평양전쟁희생자 유가족회 전북지부 회원들이 15일 저녁부터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앞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일과거문제청산을 촉구하는 태평양전쟁희생자 유가족회 전북지부 회원들이 15일 저녁부터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앞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과거사 청산이 화두로 떠오른 요즘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회(회장 양순임)가 지난 15일부터 외교통상부 앞에서 한일협정 무효화를 외치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 이에 대한 정부 대응이 주목된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회는 지난 15일 성명서를 통해 ▲외교통상부 장관은 한일협정 공개하고 한일기본조약 폐기하라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법무성 공탁금' 군인군속 11만 1260명의 피와 생명인 9136만 4001엔을 7772배로 환산하여 즉각 반환하라 ▲한일 양국은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유가족 현지 위령을 즉각 실시하라 ▲국회 보건복지위는 태평양전쟁 희생자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법안을 즉각 심의 통과하여 법사위로 넘겨라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회에 유족회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라 ▲제17대 국회는 실질적인 한일 과거사 청산기구를 즉각 구성하라 등을 요구하고 무기한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회는 지난 14년 간 일본을 상대로 '아세아 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을 해왔다. 하지만 한일 기본조약 당시 양국간 해결된 문제라는 이유로 1, 2심 모두 기각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 현대사 사료조사팀은 지난 12일 국사편찬위원회가 해외에서 수집한 한국현대사 관련 소장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일협정 체결과정 당시 박정희 정권이 일본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1965년 당시 한일협정이 합법적으로 체결됐다는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회는 "한일협정 자체가 거액의 정치자금이 뒷거래된 불법적인 조약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며 "한일협정을 근거로 한 1, 2심의 소송 기각판결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한일협정 당시 개인청구권을 폐기했다고 하더라도 국제법이 발전해 온 만큼 반인륜적 강제행위에 대해 국가가 개인의 피해보상 소송을 제한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제기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고 전했다.

또 임수정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회 회원은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일본은 강제노동을 한 한국인에게 소정의 월급을 지급하는 대신 강제 저금을 시켰다"며 "저금한 돈을 해방 후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송을 통해 정당한 임금을 환불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6일 철야농성장에 모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외교통상부 앞 차가운 보도 위에서 비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신문지를 깔고도 꿈쩍 않고 내리는 비를 맞았다. 시골에서 상경한 유가족 할머니들은 경비가 많이 들어 식사도 못한 채 빵과 김밥 한 줄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회 철야농성장에서 만난 김복남(61·경남 창원) 할머니는 "전쟁 당시 아버지가 일본 보국대 군속으로 끌려가 폭탄 나르는 일을 해왔다"며 "뱀, 개구리, 나무줄기 등으로 끼니를 때웠을 뿐 아니라 포탄소리 울리는 극도의 불안한 환경 속에 놓여 있어서 정신적인 충격도 많이 받은 듯 하다"고 토로했다.

김 할머니는 "7남매를 둔 아버지가 5년 만에 빈털터리로 돌아와서는 전쟁의 충격을 견디다 못해 밤낮 술로 세월을 보내다 돌아가셨다"며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자식들로서는 빈손으로 농사를 짓다가 결국 농협의 신용불량자 신세까지 됐다"며 보상은커녕 돌아가신 자리에 비석 한 개 세울 수 없었던 울분을 토해냈다.


꿋꿋이 농성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태선(61·서울) 할머니는 "갓난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끌려가고,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었던 당시 어머니까지 재혼해 나는 한평생 가족도 없는 고아로 살아왔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각 군 유족회에서 함께 소송 준비를 해온 정성화(73·충북서산) 할아버지는 "정신대, 노무자, 군인 등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150만 명에 이르는데 한국이나 일본 정부는 모르는 척 하고 있다"며 "박정희 정권 때 세운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이 한일협정 때 받은 일본의 정치자금이었다면 그것으로 돈을 벌었으니 지금이라도 희생자 유가족에게 제대로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할아버지는 이어 "일본에 가면 시체를 매장해 시멘트로 발라놓은 구덩이가 하나 있는데, 그걸 파헤쳐 유골을 가져와도 당장 한국에 묻을 땅 한 떼기 주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회 회장은 "우리가 철야농성을 진행하자 김경한 외교통상부 외무관이 자신을 믿고 해산해 달라고 부탁해왔지만 이 문제에 대한 외교통상부 장관의 입장과 해결방안을 꼭 들어야 하겠다"며 "만약 장관이 유족회 대표와 면담하는 날짜조차 약속해주지 않는다면 무기한 철야농성을 계속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한편 지난 13일 일제강점 피해자 99명이 한일협정 관련 57개 문건을 공개하라며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법원이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인 원고 53명에게 한일협정 문건 중 손해배상 청구권 관련 5개 문건을 공개하라"며 원고 일부승소를 판결한 바 있어 한일협정에 대한 과거청산에 기대가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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