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들이여, 분명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김훈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생각의 나무)>를 읽고

등록 2004.08.19 17:29수정 2004.08.2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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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녀가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여건과 범위에서도 결코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 땅에서는 남성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태어날 때만 해도 부모의 선호대상은 사내아이였고, 부모가 애써 키우고 공부시키는 것도 딸보다는 대부분 아들 위주였다.

사회의 주류가 남자였으니 당연히 사내들은 집과 사회에서도 무척이나 기고만장했다. 힘을 쓰는 일에서부터 머리를 쓰거나 말을 하는 일뿐만 아니라 정치판에서까지도 주요 요직은 언제나 남자들 몫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주도권을 쥐며 살아 온 사내들에게 이 땅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묻는다면 떳떳하게 대답할 사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그 시대의 여건을 탓하며 뒤로 꽁무니를 빼기에 바쁠 것이다.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그마만큼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게 남겼던 옛 세대의 사내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제 새 희망은 젊은 사내들에게 달려 있다. 이 땅의 젊은 사내들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역사와 정치, 경제와 언론 등 사회 구석구석의 어두운 부분을 밝게 해 줄 참된 원동력인 것이다.

이 땅의 젊은 사내들에게 새 희망의 풀무질을 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해 주는 책 한 권이 있다. 이는 어려웠던 시절 초야에 묻혀 생계를 위해 토막글을 썼다던 김훈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생각의 나무)>는 것이 바로 이 책. 이 책은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내들이 세상을 향해 당당하고 바르고 분명하게 살 것을 당부한 책이기도 하다.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14쪽)

작가의 아들은 평발 때문에 군 입대를 하지 못했다. 군 입대 문제로 수치를 받아야만 하는 아들의 심정을 부모의 입장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작가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권세 높은 자들이 자신들의 아들들을 군 입대로부터 빼내려는 기만과 술책을 일삼고 있는 데 대한 우회적인 시위이기도 하다.

"밥은 생물학적 본질의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며 안 먹으면 죽는 것이다. 밥 세 끼의 문제를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 본질의 비 논리성을 지적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고통 앞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진부한 잠언은 그야말로 위선이거나 허위일 수밖에 없었다."(23쪽)


"북한 배에 대한 '국민정서'란 대체 무엇인가. 국가 대표 축구팀이 공을 차 넣을 때처럼 북한 배가 내려오면 '국민정서'가 어느 한쪽으로 일시에 끓어오르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헛소리해대듯이 어느 한쪽 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정치적 욕망을 위장해 놓고서 벌이는 이런 난장 싸움판에 '국민정서'를 끌어들이지 말아달라는 부탁이다. 없는 '국민정서'의 허깨비를 만들어서 소란을 떨고 싸움질을 해대면 세상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해진다."(43쪽)


이 책은 '공'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들을 가져다준다. 축구공을 비롯해 배구공, 정구공, 아이스하키나 배드민턴 공 등 수많은 공에 대한 인문학적 관점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또한 보기 드문 저자 특유의 관찰과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요즘 들어 한창인 올림픽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현대 올림픽이 싸움을 붙여 놓고 돈을 따먹는 야바위판 같기도 하지만 인간의 몸 안에 세계를 재단할 만한 척도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올림픽의 진정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올림픽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의 갈망과 몸의 아름다움과 몸의 성취와 몸의 좌절을 보여주는 몸의 축제라는 점에서 여전히 매혹적이다. 그 필사적인 놀이판 속에서 성취와 좌절이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는 바탕은, 그 격차가 살아 있는 인간의 몸 안에서 벌어진 생명현상이기 때문이다."(132쪽)

요즘 들어서도 사내아이만을 두둔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그 좋지 않는 미덕은 끈끈히 명맥을 이어가는 듯싶다. 하지만 사내아이라고 해서 이 공정한 세상에서 결코 가산점을 받고 살 수만은 없는 세상이다.

자기 자신의 끊임 없는 노력과 바른 생각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 속에서 당당한 기틀을 마련할 수도 있고, 또 없을 수도 있다. 사내들에게 주어지는 이 세상은 결코 가벼운 세상이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이 책을 쓴 김훈은 이 세대의 사내들에게 그렇게 당부를 하며 이 책을 갈무리한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싯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시를 발려먹고 먹이만을 집어먹을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장이 꿰여져서 끌려가게 된다. 이 끌려감의 비극성을 또한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명랑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220쪽)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김훈 지음,
생각의나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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