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 ⓒ2004 을유문화사권춘오
13년간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 머물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해온 네덜란드인 이안 부루마 교수가 저술한 <근대 일본>(을유문화사)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만에 나타난 1853년부터 도쿄 올림픽이 열렸던 1964년까지를 일본의 근대로 정의하고 있다.
이 시기에 그 작은 섬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하여 오늘날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알 수 있는 값진 정보를 던져주고 있다.
프롤로그에 소개된 도쿄 올림픽의 개최와 유도 채택, 가미나가 아키오의 이야기는 이안 부루마가 일본의 근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일본인들의 과신과 광기, 국가 위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인식을 몇 가지 단어로 집약하면 아마 잔혹, 간교, 사악, 몰인정, 군국주의, 재수 없음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해방 이후, 근 50여 년이 흘렀지만 일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중대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계기가 있다면 원수처럼 으르렁댈 여지가 충분하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시합에 대한 폭발적인 국민적 관심만 봐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은가. 지기라도 하면 다음날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극복이란 반드시 이겨서 굴복시켜야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과거사를 명확하게 밝히고 서로 인정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에 동의하는 것, 역사적으로 무수한 분쟁과 폭력이 난무했었지만, 각자의 갈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협력해야 할 때 협력하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본을 그냥 이웃 나라 혹은 외국으로 대하며 갈 길을 가고 협력해야 할 때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앎'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일으키는 반일 교육만 주로 받아왔지, 일본에 대해 제대로, 객관적으로 배운 바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 대한 피상적인 껍데기만 외웠을 뿐, 일본의 내적인 부분에는 정말 무식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무관심해왔다.
이 책에서 이안 부루마는 정작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했던 이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 말기, 그러니까 일본의 침략이 구체화되기 이전 일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본은 왜 식민주의·침략국가로 나서게 됐는지, 왜 그토록 잔혹하게 식민지 정책을 펼쳤는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 내 상황을 어떠했는지, 왜 패망의 길을 걸었는지를 추적하고 전후 복구 과정과 미국과의 관계, 도쿄 올림픽까지 총체적인 일본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안 부루마에 따르면, 일본은 우리와 달리 일찍부터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서구에 대해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잘 알고 있었다. 한때 난학(蘭學)이라 하여 네덜란드 학문이 장려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미국의 페리 제독이 통상을 위해 군함을 이끌고 해안에 포를 발사하는 방식으로 일본에 도착했을 때 페리의 생각과 달리 (페리는 일본이 무지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도 서구의 실용적인 학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중국은 자국의 문화와 정신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고 서구의 물질을 이용)'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중체서용으로는 서구의 수준 높은 기술을 진정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었다.
이 같은 혼란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은 중국처럼 세상의 중심을 자기로 보지 않았고, 지혜의 중심 또한 중국이란 환상에서 일찍 벗어남으로써 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손쉽게 전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서구를 전격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다. 일본 내에는 개화에 반대하는 국학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구시대 계급들(주로 하급 무사 출신으로 구사회에서 의지할 곳을 잃게 된 젊은 극단주의자들)이 많았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신진 개화세력에 대한 테러와 암살이 수없이 많이 발생했다.
이것은 페리의 입항을 인가해준 쇼군에 대한 타도 전쟁으로까지 발전한다. 또한 이로 인해 그때까지 상징적으로만 존재했던 천황의 존재가 부각되고 존황양이(尊皇攘夷 : 천황을 섬기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이 기간 일본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얼마 전에 한국에도 번역 소개된 '사카모토 료마'다. 이안 부루마가 소개하는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보자.
하급 무사 출신으로 구사회에서 의지할 곳을 잃게 된 젊은 극단주의자들 중 섬 출신의 사카마토 료마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국가의 순수성과 야만인들의 위험에 대한 토착론자들의 선전에 고무된 그는 해군 전문가이자 저명한 난학자인 가쓰 가이슈를 완벽한 표적이라 여겼다. 가쓰는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 개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젊은 자객과 맞닥뜨렸을 때, 가쓰는 평정을 잃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러 온 게냐? 그렇다면 나와 이야기한 연후에 죽여라." 여기서 극적 반전이 펼쳐진다. 가쓰는 자신도 애국자이며, 그의 유일한 목표는 일본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야만인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술수를 배워야 하며 개항과 타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전해지는 바로 사카모토는 그의 칼을 내던지고 무릎을 끓고 자신의 '편협한 고집'을 사죄했다고 한다.
사카모토는 가쓰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바쿠후에 반대하는 남서쪽의 영지인 조슈, 사쓰마, 도사 간의 연계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담당했다.
에도 정부와 전쟁을 할 태세였던 그들에게 사카모토는 평화로운 해결을 주장했다. 이후 사카모토는 나가사키를 새로운 근거지로 그곳에서 서구 정치 체계를 공부했고 총명한 두뇌를 가지고 1867년에 바쿠후 이후의 상태에 대해 정교한 청사진을 그려내기에 이르렀다.
중·참의원, 헌법, 신분·지위 타파 등 이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대단한 발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카모토는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도쿠가와 통치의 종국과 메이지유신을 생전에 보지 못했다. 바쿠후 말년은 음모자, 자객들, 떠도는 검객들로 가득 찬 무법천지였다.
1876년 겨울, 사카모토는 몸을 숨겨주었던 절친한 간장 상인의 집에서 최후를 맞았다. 두 명의 검객과 함께 쳐들어온 자객이 사카모토의 머리와 사지를 내리쳤다. 그는 쇼군의 모든 적들을 처치하기 위해 결성된 신셍구미의 일원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일본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카모토의 선혈이 낭자했다.
이러한 어수선한 과정을 거쳐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이 단행된다. 또한 문명개화의 상징으로서 최초의 헌법이 공포됐다. 헌법을 만든 사람은 조선합병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였다. 하지만 새로운 궁중예절, 대신들의 유럽식 복장, 서양식 헌법의 어색함과 마찬가지로 헌법 또한 서양식 겉치레에 불과했다.
메이지 헌법이 규정한 일본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미약한 수준이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천황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관료들이 천황의 이름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 또한 군대는 관료들이 아닌 군주에게만 충성을 맹세했다. 연막과 베일에 싸여진 정치, 어떤 행위에 최종 책임을 지는 사람 없이, 어떤 견제도 없이 권력이 행사되는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동시에 메이지 유신은 근대 국가 건설, 즉 강대국 건설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강한 군대에 필요한 전략적인 산업이 정부에 의해 지원되었다. 이로 인해 재벌이라는 거대한 산업군이 형성되었다. 미쓰비시는 작은 해운회사로 시작해서 1930년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점차 강대국의 모양을 형성해 나갔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 등으로 내적 힘을 쌓았다. 하지만 이를 통제할 중앙 권력이 부재했다. 의회와 천황, 군부 사이에서 중심을 잃고 흔들린 일본…. 머리 없이 몸만 비대해진 그들이 나간 길은 필연적으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걸어간 길과 같았다.
근대화의 어두운 측면, 즉 식민주의와 침략주의, 제국주의였다. 이것은 후에 맥아더 장군이 미군정 최고책임자로 일본을 통치할 때, 그가 한 말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일본은 현대 문명의 관점에서 12살짜리 소년과 같다."
이운 부루마는 독일과 비슷하게 근대화를 밟은 일본이 왜 그렇게 쉽게 식민주의가 되어 이웃 국가들을 침략하게 되었는지, 왜 미국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지 또 지적·문화적인 면에서 일본만의 독특한 활기를 띄어 왔음에도 더 개방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치 질서를 발전시키지 못한 이유를 절대 권력을 추구했던 천황제와 군국주의,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강력해진 군부의 영향력을 들어 설명하고 이다.
이 책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깨고 그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이해라고 해서 그들의 과거사를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말이다. 일본과 깊은 관계를 형성한 우리의 근현대사. 그래서 우리는 일본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제3자의 시선은 일본의 약 100여 년에 걸친 근대화 시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향후 양국의 진정한 정상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이 책은 188쪽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읽는 데 있어 꼼꼼함을 요한다. 100여 년의 일본 근대사를 압축해서 소개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아쉬운 점은 번역에 좀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적당한 용어가 있는데도 몰라서 그랬는지 풀어서 번역한 것이나 매끄럽지 못한 문장 등 번역자의 성의를 의심하게 되는 부분들이 꽤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매력적인 책이다.
근대 일본
이안 부루마 지음, 최은봉 옮김,
을유문화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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