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애재라. 모니터여, 무죄한 너를 보낸다"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21) 수명을 다한 모니터에게 작별을 고함

등록 2004.08.20 06:10수정 2004.08.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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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아녀자 김씨(金氏)는 두어자 글로써 모니터에게 고(告)하노니, 디지털 세상사 가운데 중요한 것이 모니터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모니터는 한낱 소모품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눈앞에 둔지 우금(于今) 오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새벽녘에 문제의 원고를 마감하고 서둘러 <오마이뉴스>에 올리려고 하는 중에, 5년 정도 '밤새도록 낮새도록' 켜 놓았던 17인치 CRT구형 모니터의 화면이 갑자기 정전기가 나듯 지지직거리더니 별다른 인사 없이 그 불쌍한 생을 마감했다.

이럴 수가. 10년 넘은 고물 노트북 컴퓨터도 아직 제 생을 다하지 않았는데 아직까지 5년밖에 안됐는데 이럴 수가…. 도저히 믿겨지지 않아 PC업그레이드한 곳에다 물어 봤다. 그랬더니 보통 모니터 수명이 2년 정도인데 그렇게 밤새도록 낮새도록 주야장창 켜놓았는데도 5년 정도 썼다면 아주 오래 쓴 거라며 사망 선고를 하고는 새로운 모니터를 구입하란다.

그래도 나는 그 말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모니터나 TV 브라운관이나 원리는 같을 텐데 왜 5년된 컬러 TV는 아직도 멀쩡한데 모니터만 이러냐고 괜한 시비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그 시비는 듣는 사람 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버렸다.

하긴 요즘 칼라 TV도 예전 10년 넘게 사용하던 흑백 TV만큼 튼튼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건 휴대폰도 마찬가지여서 휴대폰 초창기 모델은 사람들이 도끼라고 말할 정도로 오래 사용하다 하다 못해 새로 나온 폴더폰으로 바꿀 당시에도 멀쩡했다. 그 후 처음 나온 폴더폰도 내가 실수로 물에 빠트리지만 않았어도 멀쩡하게 계속 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제일 비싼 구입 비용을 지불하며 2002년 6월에 새로 산 한 휴대폰은 2년밖에 안됐는데도 액정의 조명이 나가버려 못쓰게 되어 버렸다. 확실히 요즘 만들어내는 공산품은 기능이 다양하고 화려해졌지만 예전 것보다 튼튼하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결국 나는 하드에 저장되어 있는 원고를 마감 시간에 맞게 전송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모니터를 구입하기로 했다. 이왕이면 눈 피로도 줄이고 장소도 덜 차지하기 위해 15인치 LCD 모니터 가격을 알아 보았다. 하지만 초기보다는 많이 가격이 내려갔을 거라는 내 기대를 비웃듯 쓸 만한 LCD 모니터의 가격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대신 17인치 CRT 모니터는 완전 평면인 것도 정말 가격이 많이 내려가 LCD 모니터에 비해 절반 정도로 저렴해진 상태였다.

이쯤 되면 당연히 CRT 모니터와 LCD 모니터의 효용성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굳이 LCD 모니터를 구입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 피로도 줄이고 장소도 줄이고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 외에 두 배나 되는 비용을 더 지불하고 구입할 만한 또 다른 기능적인 장점이 있는가?


곰곰히 자문자답해 보았더니 결론은 역시 '없다'였다. LCD 모니터도 확실히 좋아졌지만 아직까지 화면의 색 구현이나 여타 기능은 가격 대비 확실히 CRT가 좋지 않은가? 어차피 지금 컴퓨터도 2002년 가을에 업그레이드한 거라 오래된 것인데 모니터만 LCD를 구입한다는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나는 결국 17인치 완전 평면 CRT 모니터를 구입했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 설치한 CRT 모니터의 전원을 켜고 간신히 마감에 맞게 원고를 전송했다. 그리고 난 후 새로 설치한 거라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모니터 화면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아마 이 컴퓨터가 조종을 고하고 새로운 사양의 컴퓨터로 구입할 때쯤이면 아마 LCD 모니터가 더욱 저렴해지겠지…. 그 때까지 고장나지 말고 나와 같이 오래 오래 살자꾸나."

그리고 곧 폐기장으로 사라질 예전 모니터에게 <조침문>의 유씨 부인이 된 기분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내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누구를 한(恨)하며 누구를 원(怨)하리요.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요. 절묘(絶妙)한 의형(儀形)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치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녁 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모니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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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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