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여자의 마음을 알아요?"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19)

등록 2004.08.23 12:38수정 2004.08.2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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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은빈이가 요즘 들어 부쩍 멋을 부립니다. 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무슨 미적 감각이 있는 것일까요? 아침에 아내가 옷을 꺼내 주면 전에는 아무 군말 없이 잘 입더니 요즘은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은빈이에게 돈을 주고 옷을 사 준 적은 없습니다. 주변에서 다 얻어 입히는데 다행히 그걸 알고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박철
지난 주 아내가 서울 친정을 혼자 다녀올 일이 있어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은빈이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자기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야 한다고 떼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하룻밤을 묵고 온다고 하자 은빈이는 저 혼자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였습니다. 그걸 어떻게 배웠을까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나한테 자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어때요, 손톱 색깔이 예쁘지요?"

며칠 전에는 오래간만에 은빈이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목욕을 시켰습니다. 비누로 머리부터 감기고 온몸에 비누칠을 하는데 은빈이가 욕실에 달려 있는 거울에 비쳐진 자기 몸을 보면서 실실 웃는 것이었습니다. 은빈이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해서 물었습니다.

"은빈아! 너 아까부터 왜 실실 웃니? 할머니한테 용돈이라도 받았니?"
"아빠! 그게 아니고요. 제가 진지하게 거울에 비쳐진 제 모습을 보니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요."
"야, 똥배가 불룩 나왔는데 뭐가 아름답냐? 그런데 너 진지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진지하게 본다는 말은요, 웃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말이에요."

은빈이는 어려서부터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길게 생머리로 길렀습니다. 아내가 아침마다 머리를 땋아주는 것이 성가신 것 같아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해 주라고 하면 은빈이는 펄쩍 뜁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빠! 생머리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아세요? 저는요, 시집 가서도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를 거예요. 아빠는 여자의 마음을 알아요?"

박철
요즘 은빈이가 주로 입는 옷은 짧은 미니 스커트에 배꼽티, 아니면 시원한 원피스입니다. 그 옷이 자기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여름 방학 내내 마당에 나가서 하루 종일 놀다 보니 얼굴이고 몸이고 깜둥이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은빈이 얼굴 사진을 찍으면 잡티 하나 없었는데 얼굴에 주근깨도 생기고, 모기에 물린 자국도 있고, 자기가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제 저녁은 저녁밥을 일찌감치 먹고 현관 앞에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아 분위기 있게 아내와 차를 마시고 있는데 은빈이가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엄마, 요즘 제가 밖에서만 놀다보니 피부가 엉망이 되었어요. 개학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피부 관리를 좀 해야겠어요."
"은빈아! 네 피부 관리가 문제가 아니라 몸매 관리를 좀 해야겠다. 너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뚱보가 되었잖아. 요즘 네 얼굴 사진을 찍으면 각이 안 나와. 다이어트 할 생각은 없니?"
"아빠는 제가 뭐가 뚱뚱하다고 그래요. 보통이지. 그리고 저는 다이어트는 죽어도 못해요."

은빈이는 아내에게 피부 관리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나는 아내와 은빈이의 싱거운 대화에서 빠져나와 저녁 달리기에 나섰습니다. 집에서 출발해서 경지 정리가 된 논길을 따라 무학리까지 갔다 오는 것입니다.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더군요.

그렇게 1시간 30분 동안 땀에 흠뻑 젖어서 헐떡이며 집에 들어왔더니 거실에 웬 조그만 아이가 대자로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만 보니 은빈인데 얼굴에 오이 썰은 것을 잔뜩 붙이고 누운 채로 나를 보고 히죽히죽 웃는 것이었습니다.

"야,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아빠는 보면 몰라요? 오이 마사지 하는 거예요."

옆에서 아내는 은빈이에게 말도 시키지 말고, 웃기지도 말라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면서 연신 '쉬쉬'합니다.

욕실을 들어 가서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은빈이는 얼굴에 오이 조각을 붙인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데굴데굴 굴러다니면서 잠을 잘 정도로 잠버릇이 고약한데 반듯하게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기특해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다 큰 처녀처럼 보이대요. 그렇게 두어 시간 잠을 자고 일어난 은빈이에게 물었습니다.

박철
"은빈아! 그래 오이 마사지를 하고 났더니 얼굴이 좀 달라졌니?"
"아빠! 손으로 만져 보았더니 촉촉하고 매끄러워진 것 같아요. 그리고 오이 마사지를 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잠이 잘 와요."

은빈이는 지금 모기장 안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습니다. 잘 때는 역시 팬티 차림입니다. 내가 숙녀가 어찌 팬티만 입고 자냐고, 잠옷을 입고 우아하게 자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아빠한테는 자기가 영원한 딸이므로 예쁘게 보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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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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